ADVERTISEMENT

'봄날은 간다' 허진호 감독 "죽음과 사랑은 내영화의 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극장을 나서면서, 감독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지는 영화가 있다. 만든 이의 개성이 스크린에 뚜렷이 묻어나는 작품이라는 뜻일 게다.

지난 달 28일 개봉한 '봄날은 간다' 는 기본적으로 연애담이다. 영화를 본 이들은 아마도 '아, 저건 내 얘기야' '저 남자(여자)는 누구 같애' 라며 주인공과의 동일시(同一視)체험에 잠시라도 빠졌을 듯 싶다. 그런 다음 '저건 혹시 감독의 경험담이 아닐까' 라는 스캔들성 흥미를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기실 사랑이야기는 우리 주위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 허진호(38) 감독의 말마따나 "연애는 많은 이들이 겪는 보편적인 체험" 이다.

물론 누구나 겪기 때문에 하찮다는 건 아니다. 각자에게 그것은, 과장해서 우주 못지않은 크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봄날은 간다' 를 보고 감독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지는 까닭은 연애라는 사적 체험을 인간 실존의 문제로까지 격상시킨 데 있다.

표피를 살짝 건드리는 게 아니라 피하층 깊이 내려간 주사액이 서서히 퍼지 듯 영화가 주는 감동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허감독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 처럼 이번 영화도 연애담이기 이전에 사실은 소멸하는 것들, 유한(有限)한 것들에 대한 쓸쓸한 애가(哀歌)가 아닐까 싶다.

'8월…' 이 시한부 삶을 사는 주인공(한석규)을 통해 죽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웠다면 '봄날…' 에서는 치매를 앓는 할머니의 존재 때문에 죽음과 사랑의 대위법이 도드라진다.

두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사랑에 저돌적으로 빠지지 못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원심력이 사랑의 반대항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지 싶다. 죽음(소멸)과 사랑(에로스)이라는 두 척력의 팽팽한 대립을 통해 허감독 영화는 원 운동을 지탱해 간다.

***아버지 환갑잔치때 작품구상

"10년 전 아버지 환갑 잔치 때였다. 식사가 끝나고 여흥 시간에 어머니가 노래를 불렀는데 그 곡이 바로 '봄날은 간다' 였다. 그것도 가사처럼 연분홍 치마를 입고서. '연분홍 치마가 봄 바람에 휘나알리더라~' . 그 때 어머니는 가사를 음미하듯 살짝 눈물을 보이다가 금세 즐거운 표정을 짓곤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열여덟, 열아홉 청춘 시절은 어땠을까' 라는 의문이 스쳤다. '8월…' 을 끝내고 차기작을 준비하면서 그 이미지를 다시 떠올렸고 관련 책을 찾아보며 연구를 했다.

특히 한시(漢詩)에서 비슷한 느낌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예컨대 '봄이 오면 상춘객들은 즐거이 노래하지만, 나는 봄이 오히려 슬프다' 같은 한시가 기억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영화의 이미지를 누적해 갔다. "

***심은하 대신 이영애 대만족

"기획 초기엔 이영애씨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심은하씨와 교섭이 잘 안 풀리면서 이씨로 바꿨다. 이씨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낌이 아주 좋았다.

미리 건네준 시나리오를 읽고 행간의 감정과 정서를 이야기하는데 내가 애초 생각하는 것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야기 도중 고개를 갸웃하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하는 등 분위기도 마음에 들어, '이 느낌으로 가져가면 괜찮겠다' 는 판단이 섰다. 이씨는 연기에 관한 한 억척스럽기 그지없다.

아마 내가 백 번을 다시 찍자고 해도 백 한번을 찍자고 할 배우다. 결과적으로 이번 영화에서 이영애씨 연기가 높은 점수를 받아 나도 기쁘다. "

***모성 결핍은 느껴본 적 없어

" '8월…' 에서도 그렇고 이번에도 남자 주인공에게는 어머니가 없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그렇게 됐다. 개인적으로 성장하면서 모성의 결핍을 느낀 적은 없다.

지금도 어머님은 생존해 계신다. 글쎄, 남자 주인공의 가정환경을 구성하면서 할머니와 아버지, 고모는 그림이 되는데 어머니를 넣으니까 어머니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았다. 단지 그런 이유에서 어머니를 제외했을 뿐이다. 내 영화의 남자 주인공들이 여성과의 사랑에 소극적이고 '권력의지' 가 없는 게 모성의 결핍 탓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

***작은 부분도 그냥 못지나쳐

"나는 영화를 보다가 미세한 부분에서 걸리면 그게 걸려서 계속 보질 못한다. '8월…' 에서도 그랬다. 심은하와 한석규가 아이스케이크를 먹을 때 창밖에서 부는 바람소리랑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를 제대로 살리고 싶었는데 생각만큼 안 돼 찜찜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는 사소한 소리라도 제대로 살리고 싶었고 그것을 구현하려면 사운드 엔지니어라는 직업이 어울릴 것 같았다. 문제는 감독이 이처럼 애써 집어넣은 요소들에 대해 관객들이 무심하거나 눈치를 전혀 못채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촬영을 빨리 진행해야 경비나 시간이 절약되는 만큼 제작자들도 '그거 관객들이 알지도 못할 텐데 굳이 심혈을 쏟을 필요가 있느냐' 고 나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조명이나 사운드에 무신경해지고 영화는 그만큼 질적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고 관객들을 교육시킬 수도 없고, 딜레마다. "

***재미 살리려다 큰것 잃기도

"조감독 시절 박광수 감독은 '내(감독)가 곧 관객' 이라고 생각하라고 했다. 감독이 재미있다고 느끼면 관객들도 좋아한다는 의미일텐데 나는 아직 자신이 없을 때가 많다.

현장에서도 스태프들이나 배우들한테 자주 묻는다. 이거 재미있느냐고. 나는 기본적으로 관객이 재미있어 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때로 거기에 강박적으로 매달릴 때가 있다. '봄날…' 에서도 그런 부분이 몇 곳 있다.

유지태가 이영애의 차를 긁는 부분, 유지태가 노래를 부르면서 가사가 적힌 책을 펴 보는 장면, 할머니가 '버스랑 여자는 떠나가면 잡는 게 아니야' 라고 말하는 장면은 그런 강박증의 산물인 것 같다.

그러다보니 왠지 자연스럽지 못하고 좀 튄다. 특히 할머니 대사에 대해 말들이 많은데 그건 내가 고집해서 넣었다. 그게 주젠데 어떡하느냐면서(웃음). 영화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내 경우엔 나를 열어 놓는 개방형 커뮤니케이션을 선호한다. 하지만 관객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는, 늘 과제다. "

글=이영기,

사진=김태성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