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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우는 맛 먹는 맛 … “감자 심기, 카트라이더만큼 재밌어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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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호 06면

서울 중화동 한내들어린이집 옥상에 마련된 텃밭. 감자·상추·고추·두릅·앵두 등 20여 종의 채소와 과일을 아이들이 교사들과 함께 직접 기른다. 이 어린이집의 옥상 텃밭은 지금의 유혜주 원장이 부임한 2002년 시작됐다.

● 어린이집 옥상에서 9년째 농사짓는 유혜주 원장
“흙이 동글동글해요.” “흙 만지면 느낌이 꼭 치즈 같아요.”
지난달 29일 서울 중화동 한내들어린이집 옥상에는 푸른하늘반·무지개반 아이들 30여 명이 모였다. 이 어린이집의 자랑인 옥상 텃밭에 상추와 감자를 심는 날이다. 흙을 만지는 고사리손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감자가 보이면 안 된다’는 교사의 말에 여섯 살 이지상 어린이는 몇 번이고 흙을 꾹꾹 눌러 덮었다. 덜렁대는 옆 친구의 감자까지 흙으로 덮어 준다. 한쪽에서는 상추 모종을 텃밭에 옮기는 아이들이 보인다. 양정환 어린이는 “상추를 예쁘게 키워 어린이집 동생들이랑 선생님들께 주겠다”고 말한다. 김경민 어린이는 “감자 심는 게 카트라이더(온라인게임)만큼 재밌다”며 웃는다.

회색빛 도심에서 녹색꿈 일구는 시티 파머들

이 옥상에는 전날 심은 앵두나무를 비롯해 고추·두릅나무·블루베리나무 등 20여 종의 채소와 과일이 자라고 있다. 모두 어린이집 교사와 아이들이 직접 심고 가꾸는 것이다. 며칠 후에는 토마토·오이·옥수수도 심을 예정이다. 이 어린이집에는 옥상 텃밭 외에 현관 앞 주차장에도 한 평 남짓한 초미니 논이 있다. 매년 한 솥 분량의 밥을 지을 쌀이 나온다. 올 모내기는 다음달 중에 역시나 교사·아이들이 함께할 계획이다. 옥상 텃밭은 어린이집 유혜주(52) 원장의 아이디어다. 유 원장이 이곳에 부임한 2002년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흙 냄새를 맡게 해 주고, 뭔가를 ‘키우는 맛’을 느끼게 해 주려는 뜻에서다. 특히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들일수록 생태교육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농사 노하우는 함께 사는 시어머니가 집 옥상에 더덕·도라지 등을 키우는 모습을 보며 터득했다.

김무숙씨가 사는 서울 방이동 3층짜리 빌라의 옥상 텃밭에는 100여 종의 채소·과일 나무가 있다. 김씨와 남편은 수시로 이곳에 올라와 채소를 가꾼다. 주말에는 아들과 며느리도 함께한다. 김씨가 손녀딸 동민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옥상 텃밭은 처음에는 버려진 화분이나 스티로폼 등을 재활용해 흙을 담을 상자를 만드는 걸로 시작했다. 여기에 상추·피망·땅콩 등을 심어 아이들과 함께 키우면서 조금씩 규모를 넓혀 갔다. 이후 농작물에 대해 어린이들이 보여 준 관심은 유 원장의 기대를 웃돌았다. 한번은 어린이들 사이에 ‘오줌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사람의 소변은 다량의 질소가 포함돼 있어 상추를 키우는 데 최적의 비료다. 유 원장은 처음에는 수집이 쉽다고 생각해 남자아이들의 소변만 썼다. 소변을 모아 3일 동안 삭힌 뒤 물과 섞어 상추 밭에 뿌렸다. 그러자 여자아이들이 항의했다. “내가 심은 상추에는 내 오줌을 써야 한다”고들 주장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 덕분에 유 원장은 직접 키우는 식물에 대한 아이들의 각별한 애정을 실감했다.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1일 서울 서초구 대원주말농장에서 열린 도시농업포럼 주최 ‘도시 농사꾼, 2010 나서다’에서 상추 모종을 옮기고 있다

아이들의 식습관도 달라졌다. 밥을 먹을 때 시금치나 배추를 찾게 된 것이다. 직접 농작물을 키우기 전에는 이런 채소에 손도 안 대던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자기가 재배한 농작물을 먹지 않는 아이는 없습니다. 자기가 직접 키우고 돌보다 보니 채소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진 거죠.” 학부모들의 시선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공부 안 하고 노는 게 아니냐’며 우려하던 학부모들도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학부모가 이 같은 체험이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는다. ‘놀이공원에 데려가는 것보다 직접 농작물을 키우는 게 교육적 효과가 몇 배나 좋을 것’이라고 말하는 학부모도 있다고 한다. 이 어린이집에서 직접 키운 작물은 아니지만 아이들과 종종 ‘차(茶) 명상’ 시간도 갖는다. 한창 산만할 때인 7세 미만 아이들인데도 녹차를 잘 마시고, 명상에 곧잘 따른다. 유 원장은 “식물에 대한 관심이 식습관뿐만 아니라 집중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어린이집에는 지난해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다. 서울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지원금을 받게 된 것이다. 지원금으로 옥상 텃밭을 넓히고, 농작물의 종류를 늘렸다. “마음먹고 도시 농업을 시작하면 지원해 주는 단체도 많고 도와줄 사람도 많아요. 요즘엔 도시 농업 노하우를 담은 책도 많아 금방 만족할 만한 수확도 할 수 있고요.” 유 원장은 어린이집 바깥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도시 농업을 적극 권유한다. 어린이집에서의 경험을 통해 농사일이 사람들을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충분히 느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 일이, 지레 겁내는 것보다는 쉽고 간편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옥상이나 앞마당이 없어도 충분히 작은 텃밭을 꾸릴 수 있어요. 예컨대 상추는 햇빛 아래보다 그늘에서 오히려 잘 자라니 실내에 작은 상자 하나 만들어 놓고 키우기 딱이죠.” 물론 시작이 손쉽다고 수확까지 쉽게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유 원장은 정성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한다. “벼는 사람의 발 소리를 듣고 자란다죠? 결국 가족처럼 돌보겠다는 마음가짐이 농사일의 핵심입니다.”

● 빌라 옥상서 15년 넘게 농사한 김무숙씨
김무숙(62)씨의 집은 서울 방이동에 있는 3층짜리 빌라의 3층이었다. 김씨는 기자를 3층 옥상 텃밭으로 안내했다. 남편 여태연(64)씨와 맏며느리 허은영(37)씨, 손녀딸 동민이(4)가 함께했다. 옥상으로 통하는 작은 쪽문이 열리자 30평쯤 되는 옥상은 사람이 움직이는 통로를 빼고는 시멘트로 칸막이가 된 밭과 스티로폼 화분이 줄을 이었다. 옥상 텃밭에서는 김씨가 지난달 남편과 함께 심은 토마토·오이·호박 모종들이 이제 막 흙을 뚫고 푸른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봉선화와 골담초, 가시오가피 잎도 활짝 피었다. 손녀 동민이는 우엉 잎, 취나물을 따기 시작했다. 매주 김씨네를 찾는 동민이는 상추와 고추의 잎만 봐도 어떤 채소인지 척척 알아맞힌다고 한다.

김씨는 “이곳에는 상추·고추·시금치·더덕부터 석류나무·자두나무·포도넝쿨 같은 채소와 꽃·과일나무가 100가지는 될 거예요”라고 말했다. 이곳은 동네 정원 노릇도 한다. “가을이 되면 호박이 벽을 따라 주렁주렁 달리고 석류 열매도 알알이 맺힙니다. 그때가 되면 이 텃밭은 더할 것 없이 아름다워져요. 동네 이웃들이 ‘천사의 정원’이라고 감탄할 정도지요.” 요리 PD이면서 원예강사인 김씨는 12년째 옥상에 텃밭을 일구며 살고 있다. 주말농장을 꾸리던 시절까지 따지면 15년 넘게 서울에서 소규모 농사를 지어 온 ‘도시 농사꾼’이다. “농작물을 기르는 일은 어린아이 키우는 것과 같아요. 며칠만 관심을 두지 않아도 금방 시들고 지나치게 다듬으려 해도 오히려 잘 자리지 않죠.” 김씨의 말에 따르면 그는 100여 명의 ‘정성 들여 돌봐야 할’ 자식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김씨가 도시 농업을 시작한 계기는 어릴 적 향수 때문이다. 대구에서 살던 어린 시절 김씨네 집 마당엔 작은 밭이 있었다. 토마토·감자·우엉 따위를 심으며, 줄기가 굵어지고 잎이 커 가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집 앞 동산에서 산나물을 캐서 먹고 근처 강에서 물고기를 낚는 일이 일상이었다. 결혼한 뒤 서울에서 살다 보니 ‘흙 냄새’가 그리워졌다. 직접 키운 호박 잎에 쌈을 싸 먹는 맛을 자식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처음에는 몇 명의 이웃과 함께 주말농장을 꾸리고 호박 등을 심었다. 그러나 거리가 먼 탓에 금세 방치됐다. 꽃과 채소를 정성 들여 키우고 싶은 마음은 컸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김씨는 문득 ‘옥상이 있는 집’을 떠올렸다. “집에 밭을 일굴 공간만 있다면 많은 먹을거리를 직접 재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남편도 김씨의 의견에 전적으로 따랐다. 아파트를 팔고 옥상을 사용할 수 있는 연립주택으로 집을 옮겼다. 이사할 때 옥상을 쓰는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옥상을 흙바닥으로 개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종이상자와 화분 따위에 흙을 담아 텃밭을 꾸렸다. 김씨네 ‘유기농 정원’이 탄생했다.

몇 종류의 꽃과 채소로 시작한 텃밭에서는 이제, 출가한 세 자녀네 식구와 이웃들에게 듬뿍 나눠 주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농작물이 나온다. 자두와 포도는 늘 남아 잼으로 만들어 둔다. 머루는 머루주를 담가 놨다가 손님들이 오면 대접한다. 가지와 감은 매년 100개 이상씩 열려 이웃(빌라 1, 2, 3층 9가구)에게 나눠 준다. 골담초·가시오가피 등의 약초는 약재로 만들어 쓴다. 이렇다 보니 김씨네 옥상은 늘 많은 손님으로 북적거린다. 여름에는 자두나무·석류나무에 매미들이 달라붙어 울어댄다. 비가 올 때면 고추잠자리가 떼지어 온다. 포도알이 실하게 익으면 새까지 날아온다. 주변 사람들의 발걸음도 잦다. 막내아들의 친구들은 김씨네 집에 들르면 옥상부터 올라간다. 한결같이 ‘시골 고향집에 와 있는 기분’이라며 감탄한다. 구구단 외울 나이도 못 된 손자·손녀들은 할머니댁에 올 때마다 꽃나무 이름을 하나씩 익힌다. ‘도심 속 작은 생태공원’ 역할까지 한다.

김씨의 텃밭은 콘크리트 옥상만 바꾼 게 아니었다. 우선 가족들의 식습관이 변했다. 일례로 김씨가 장교로 군에 입대한 첫째 아들의 첫 면회 때 싸 들고 간 음식은 호박 잎과 된장이었다. 이유는 하나다. ‘아들이 원해서’다. 그날 면회소에 있던 다른 ‘군인 아들들’은 모두 피자와 치킨을 먹고 있었다. 며느리들도 금요일이면 멀리 일산에서 김씨네로 어김없이 찾아온다. 김씨에게 도시 농사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서다. “이제는 며느리들이 각자 집에서 키운 상추를 따 와서 제게 자랑하기도 해요.” 며느리들의 ‘농사 공부’는 곧 손자·손녀들의 유기농 식단으로 이어진다.

집안 분위기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텃밭에 크게 신경 쓰지 않던 남편 여씨는 이제 가장 든든한 ‘농사 도우미’다.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옥상에 올라와 농작물을 돌보는 사람도 바로 남편이다. 자연스럽게 밭을 일구기 전보다 대화도 많아졌다. 주말이면 며느리와 사위, 손자·손녀까지 모여 화전을 부쳐 먹고 우엉 쌈을 싸 먹는다. “동네 이웃들이 ‘귀찮지 않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자식들이 자주 찾아와요. 왜 귀찮겠어요. 애들 건강하게 먹이는 게 제 일인데요.” 김씨는 텃밭뿐만 아니라 가족의 건강과 행복까지 함께 일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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