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의결권없이 투자만 하라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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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가 규제 완화와 경쟁력 향상을 내세워 추진하는 일련의 재벌 정책이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시늉만 내는 선에 그치고 있다.

4일 이남기 공정거래위원장이 발표한 출자총액제한 완화 조치나 5일 당정 협의를 거쳐 확정된 은행법 개정안 등은 재벌 규제를 획기적으로 풀고 외국 기업과의 역차별 문제를 해소했다는 정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박수를 받기는커녕 반발만 사고 있는 실정이다.

공정위가 내놓은 방안의 핵심은 30대 그룹에 출자총액이 순자산의 25%를 넘을 수 있도록 하되, 그 초과분은 의결권을 제한하고 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자산 총액 3조원 이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는 25%를 넘는 출자분은 내년 초까지 전액 해소토록 하고, 또 규모순으로 1위부터 30위까지의 모든 재벌을 규제했던 기존 제도를 다소 완화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경영 투명성 제고, 재무.지배구조 개선 등을 통해 명실공히 자율적인 시장경제로 나아가자는 재벌 개혁의 근본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다. 출자는 늘리되 의결권 같은 권한은 줄 수 없다면 어떤 기업이 투자를 늘릴 것인가.

재벌 개혁을 통한 기업 경영의 투명성이 어느 정도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또 최근 불황이 과도한 기업 규제와 투자 위축 때문이라는 판단 하에 출자총액제한을 포함, 재벌 규제를 근본적으로 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분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보면 이번 공정위의 방안은 미흡하기 짝이 없다. 의결권 제한 그 자체가 재산권 침해의 소지가 있을 뿐 아니라, 의결권 행사가 경영 개선 노력의 핵심적 수단임을 고려하지 않은 발상이다.

또 3조원 등 근거가 모호한 자산 규모를 기준으로 재벌 지정을 계속하겠다는 것은 '무늬' 만의 규제 완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인식은 산업자본이 4%를 초과해 소유하는 은행 지분에 대해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겠다는 은행법 개정안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재벌 개혁과 규제 완화의 근본 취지를 다시 검토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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