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개전압박… 탈레반 벼랑끝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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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아프가니스탄 종교회의가 '오사마 빈 라덴이 자진해서 아프간을 떠나라' 고 결정한 것은 사실상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결과다. 계속 빈 라덴을 끼고 있을 경우 초래될 미국의 공격을 감당해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결정을 내리면서도 미국과 성전을 벌이겠다고 한 것은 빈 라덴 이외의 요구는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배수진을 친 것으로 보인다.

◇ 울라마 회의의 전격 결정=20일 카불에서 속개된 울라마(이슬람 율법학자)회의는 당초 예상을 뒤집고 신속한 결정을 내렸다.

전날 이 회의에 참석한 1천여명의 이슬람법 학자들이 격론을 벌였지만 난항을 거듭했었다. 참석자 대부분은 '테러범행을 입증할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빈 라덴의 신병을 미국에 넘겨줄 수 없다' 는 최고 지도자 무하마드 오마르의 입장을 지지했었다.

20일에는 빈 라덴의 신병인도문제와 함께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동맹국들의 공격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그리고 미국에 대한 지하드(聖戰)선언 여부도 함께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이런 회의는 앞으로도 며칠 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게 대부분의 관측이었다.

그러나 이런 관측을 뒤집는 결정을 내린 것은 미국이 이날 '무한 응징작전' 계획을 공식 발표하고 군사력을 속속 집결시킬 뿐 아니라 '동맹' 격인 파키스탄이 등을 확실히 돌리는 등의 사태에 압력을 느낀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사방이 포위된 가운데 탈레반 하나만 미국에 대립하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이번 결정은 그러나 외형상 미국의 입장을 모두 수용한 것이 아니다. '손님' 인 빈 라덴이 스스로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탈레반의 어려움을 덜어달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게 될 경우 악화될 회교권 내에서의 위신, 국민감정 등을 고려한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절차상 이 결정은 탈레반 최고지도자 오마르의 결정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의 최종입장이 결정되기까지는 아직 단계가 남아 있다.

그러나 오마르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울라마회의의 결정은 사전조율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탈레반은 인정해달라' =울라마가 미국의 결정을 사실상 수용하는 형태의 결정을 내린 뒤 '침공하면 성전을 벌인다' 고 한 것은 미국이 '테러범뿐 아니라 테러범을 머물게 해준 나라도 공격한다' 고 한 때문이다.

빈 라덴이 떠나면 우리를 공격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 빈 라덴 떠날까=빈 라덴의 입지는 극단적으로 위축됐다. 이같은 결정에 따라 그는 공식적으론 어떤 나라의 도움도 받지 못할 처지로 전락했다. 그의 지하조직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은 미국이 작전을 벌이기에 유리한 상황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워낙 신출귀몰한 '재주' 를 가진 빈 라덴이어서 그가 쉽게 잡힐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기엔 아직 이른 것 같다.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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