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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량의 월드워치] 미국서 뿌린 테러 씨앗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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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 정치학자 찰머스 존슨은 지난해 주목할 만한 책을 한 권 펴냈다. 『역(逆)타격 : 미 제국의 비용(Blowback:The Costs of American Empire)』이 그것이다.

'역타격' 이란 미국 CIA에서 쓰는 용어로 어떤 공작(또는 공작원)이 거꾸로 공작 입안자를 공격하는 상황을 말한다. 달리 표현하면 '부메랑 효과' 라고도 할 수 있다.

존슨은 이를 미국의 대외정책에 적용했다. 냉전 시절 미국이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할 목적으로 만든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들' 이 냉전이 끝난 지금 미국을 적대(敵對)해 공격해 오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은 소련군에 맞서 싸운 무자헤딘 게릴라들을 지원했다. 무자헤딘엔 아프가니스탄뿐 아니라 아랍권 국가 출신들도 많았다.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한 뒤 고국에 돌아간 참전 용사들은 걸프전 후 미군이 중동에 주둔하자 미국을 적으로 삼고 이교도를 몰아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걸프전을 일으킨 이라크도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 이슬람혁명의 확산을 막는 명분으로 미국에서 많은 지원을 받았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니카라과의 좌익 산디니스타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양성한 콘트라 반군은 지금 미국에 코카인을 밀수출하고 있다.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서 발생한 연쇄 테러 사건도 역타격의 한 예다. 사건 주모자로 지목받는 오사마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 내전 당시 CIA가 훈련시켰다.

하지만 지금 빈 라덴은 미국의 '공적(公敵) 제1호' 다. 존슨은 연쇄 테러 사건이 미국이 과거에 저지른 과오에 대한 '비용 청구' 며 유사한 사건들이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왜 WTC와 국방부가 테러 공격의 목표가 됐는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미국에 대해 그토록 격렬하고 조직적인 적대행위를 하도록 하는지를 자성(自省)해야 한다고 존슨은 충고한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로, 20년 동안 전화(戰禍)에 찌든 아프가니스탄이 세계 최강국 미국의 상대가 되리라곤 상상할 수조차 없다. 행방을 알 수 없는 빈 라덴 대신 애꿎은 민간인들만 희생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 내에서도 성급한 전쟁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철저한 보복과 응징을 외치는 애국주의의 함성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이와 함께 이슬람포비아(이슬람공포증)가 확산돼 죄없는 아랍계 미국인들을 상대로 한 가혹 행위가 저질러지고 있다.

과거 냉전 시절 미국은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잘못된 씨앗들을 뿌렸다. 그 씨앗들이 자라 지금 화근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일방주의를 내세우며 타협과 공존이 아닌 대립과 갈등을 향해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한번 잘못된 씨앗을 뿌리는 것일지 모른다.

정우량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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