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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우 31명 온몸으로 '감동의 화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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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하얀 양복을 차려입은 구가연(15)양이 수줍은 듯 무대에 오르자 청중은 숨을 죽였다. 평소 자폐 성향으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연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탁 트인 목소리로 '사랑이란'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홀트일산복지타운의 합창단 '영혼의 소리' 가 1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공연에서 감동의 화음을 연출하고 있다. 사진: 변선구 기자

"사랑이란 즐거워요. 하던 일을 멈추고 주위를 보세요. 여유 한 번 부려요. 사랑의 시작은 아주 작아요."

곧이어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은 같은 복장의 '천사'31명이 하나 둘 무대를 메우며 가연이의 솔로를 합창으로 이어갔다. 도자기를 굽는 순구도, 눈을 감고 부르는 게 더 편한 세탁실에서 일하는 대영이도, 모르는 게 없다고 '안기부 부장'으로 불리는 희목이도, 박자를 항상 길게 빼 지적을 받는 전길이도 신이 나 따라 목소리를 높였다. 신나는 율동도 곁들였다. 긴장해서 몸을 가누기가 더욱 어색해 저마다 짓고 싶은 표정을 짓고, 가끔 안경을 벗어 닦기도 하는 등 어색한 행동도 하지만 모두 최선을 다해 입을 하나로 모았다. 단조롭지 않게 여러 가지 변주도 시도했다. '꼬마야'등의 돌림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소프라노.베이스 등으로 나눠 화음도 맛깔스럽게 낸다.

이들은 홀트일산복지타운 장애우 합창단인 '영혼의 소리' 단원들. 지능지수가 70이 되지 않는 정신지체장애, 색소가 생기지 않는 백색증, 뇌병변(일명 뇌성마비) 등 여러 종류의 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이지만 홀트아동복지회의 창립 49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16일 저녁 세종문화회관 소극장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1시간30분 동안 화음으로 영혼을 울렸고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와 함께 '앙코르'를 외쳤다.

비록 마음 속에서 울리는 음악과 몸이 만드는 음정과 박자가 일치하지 않고 입술과 혀가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아 가사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이들은 온몸으로 노래를 불렀다. 청중은 최선을 다해 노래를 선사하는 이들을 눈물을 훔치며 바라보다 한 곡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합창단 마스코트는 최연소 단원 이강영(7)양. 미숙아로 태어나 말을 배워야 할 나이에 성대를 절개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늘 웃는 얼굴로 분위기를 이끈다. "강영이는 오늘 립싱크로 따라 부르지만 언젠가 목소리를 찾아 솔로 역할을 해보고 싶어한다"는 게 사회복지사 박송이씨의 귀띔이다.

절망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던 이들에게 노래는 세상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오랜 시간 서 있기도 힘들고 50번 이상을 들어야 한 소절을 외우는 이들에게 연습은 힘든 일이었다. 스스로 악보를 읽을 수 없어 한 곡의 짧은 동요를 외우는 데도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모두 즐겁게 일주일에 세 번 홀트교회에 모여 연습을 했다. 그 결과 일곱살의 강영이부터 마흔일곱의 한대영까지 단원 모두가 이날 '수퍼스타 예수'를 포함해 가스펠과 한국 동요 등 19곡을 외워 불렀다.

이들을 '노래하는 천사'로 만든 사람은 지휘를 맡고 있는 박제응(40.경희대)교수다. 1984년 스위스에서 지체장애우들과 함께 공연한 경험을 살려 6년째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재활치료 차원에서 노래 연습을 시작했지만 이제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장애우 합창단이다. 경기도와 고양시가 공식 후원하고 있다.

두 팔을 잃은 중증장애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가스펠 가수로 우뚝 선 스웨덴 출신의 레나 마리아처럼 되고 싶은 것이 꿈인 김신화(15)양은 "그동안 받은 사랑을 노래로 부를 때 너무 행복해요. 어느새 노래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게 됐죠"라며 수줍게 웃었다.

이날 행사에는 경기도와 중외제약을 비롯한 21개 단체가 후원을 자청했다. 홀트아동복지회 이종윤 회장과 합석한 홀트 이사장 말리 홀트도 "기교가 아닌 영혼으로 노래하는 이들을 통해 많은 사람이 마음이 맑아지는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날 휠체어에 탄 채 독창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윤선이에게 꽃다발을 건넨 어머니 유연순(48.고양시 토당동)씨는 "CCM(복음성가)가수가 되고 싶다던 네 꿈이 오늘 이뤄졌구나"라며 딸을 꼭 껴안았다.

이원진 기자

*** 홀트 합창단은…

30여명으로 구성된 '영혼의 소리' 합창단은 홀트아동복지회(1955년 설립)의 후원으로 99년 창단했으며, 국내에서 활동하는 단 하나의 장애우 합창단이다. 지휘자인 박제응 교수의 제안으로 창단한 뒤 140회가 넘는 국내외 공연을 펼쳐왔다. 최근 미국 포틀랜드주와 노르웨이.덴마크 등 4개 지역을 돌며 공연했다. 매년 여름 장애우.비장애우가 함께하는 공연과 겨울 정기공연 등 1년에 20차례가 넘는 행사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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