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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국화와 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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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풀잎에 맺힌 찬 이슬이 흰 서리로 변할 무렵 국화는 활짝 피어난다.

기화요초가 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리는 봄.여름을 피해 대기에 찬기운이 감도는 가을날 무서리 속에 홀로 피어나는 국화의 자태에는 고고한 기품이 배어 있다. 그래서 국화는 매화.난초.대나무와 더불어 사군자의 하나로 묵향을 벗삼는 선비들의 영감을 자극해 왔다.

동양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완상식물 가운데 하나인 국화가 언제 이 땅에 전래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조선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이 지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고려 충숙왕 때 중국 천자가 보냈다는 기록이 있지만 거기서 유래를 찾긴 어렵다.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풍습이 중국에 있었고, 국화로 술을 담가 마시는 풍습은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된다.

충청도 청양지방에서 전래되는 '각설이 타령' 에는 "9월이라 9일날에 국화주가 좋을시고" 라는 구절이 있고, 경상도 성주지방 전래민요에도 "국화꽃이 피었고나/아금자금 꺾어내어/술을 하며 돌아보니" 라는 가사가 있다.

예부터 국화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었다. 조선시대 송순(宋純)은 "풍상이 섞어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를/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도리(桃梨)야 꽃이온양 마라 님의 뜻을 알리라" 며 주군에 대한 일편단심을 노래했다.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춘풍 다 지내고/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너 홀로 피었는가/아마도 오상고절(傲霜孤節)은 너 뿐인가 하노라" 는 이정보(李鼎輔)의 시조다. 서리를 맞으며 꼿꼿이 홀로 핀 국화를 바라보며 옛선비들은 자존심과 기개를 떠올렸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의 민족성을 함축하는 두 개의 키워드로 국화와 칼을 골랐다. 국화를 가꾸는 '다테마에(겉모습)' 속에 감춰진 칼 같은 '혼네(속마음)' 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유혹에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대장부의 모습은 국화 같기도 하고, 칼 같기도 하다. 은나라에서 녹을 먹던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땅에서 나는 곡식은 먹을 수 없다며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다 주려 죽었다.

한술 더 떠 사육신 성삼문(成三問)은 "고사리조차 뉘 땅에서 난 거냐" 며 백이.숙제를 원망했다. 딸깍발이 국문학자 이희승(李熙昇)선생은 지조없는 사람은 '정신적 매춘부' 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지조도 절개도 사라진 요즘 '단칼' 이니 '물칼' 이니 떠든다는 자체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곧 국화의 계절이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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