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병에 놀란 부시맨 안 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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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융합, 완전히 새로운 메가 트렌드다. 기술·제품·서비스의 결합을 통해 산업 간 칸막이를 무너뜨리고 있다. 우리가 예견하지 못하던 새로운 시장을 계속 창출하고 있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는 앨빈 토플러가 예견했던 ‘제3의 물결’을 뛰어넘는 ‘제4의 물결’에 비견된다.

지식경제부는 2010년 업무보고를 통해 글로벌 융합 트렌드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산업융합촉진법 제정 계획을 발표했다. 일부에선 법 제정이 꼭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 실제로 과거 정부에선 지나치게 많은 영역을 법으로 규율하려는 입법 만능주의적 성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법의 제정은 오히려 ‘입법의 홍수’를 완화하고 패러다임의 변화를 적극 수용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시장에서는 융합제품의 활성화에 장애가 되는 요인으로 법과 제도상의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S중공업이 트럭과 지게차를 결합해 만든 트럭지게차의 사례를 보자. 시장성이 좋은데도 트럭인지, 지게차인지 기준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제품 승인이 지연돼 수십억원에 이르는 손해가 발생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방안은 모든 부처가 나서 융합을 통해 새로 등장하는 수많은 제품 영역을 수용하는 쪽으로 소관법령을 일일이 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매번 수요가 있을 때마다 건별로 대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정부가 산업융합촉진법 제정에 나선 것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융합 트렌드에 부합하게 수십, 수백 가지 개별 법령들을 모두 개정할 수 없다면, 큰 틀의 융합법을 제정하는 게 차선책이라는 뜻이다.

또 산업융합촉진법을 제정할 경우 융합 신산업에 대한 법적 지원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이로써 새 업종이 등장할 때마다 개별 법령을 제정해야 하는 부담도 덜어 입법 효율성을 높이는 측면이 있다. 결국 융합 트렌드에 맞춰 매번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기도 어렵고, 기존 법률을 일일이 개정하기도 곤란하다면, 융합 촉진을 위한 별도의 법을 제정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입법 방향으로 보인다.

한편 법률이 눈부신 융합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는 한계도 지적된다. 딱딱한 법률은 급변하는 패러다임 시프트의 속도를 100% 따라갈 수 없다.

정부가 제정하려는 산업융합촉진법도 마찬가지다. 이 법 하나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다만 법령이나 제도가 융합의 속도를 따라가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융합 촉진에 장애요인이 돼서는 안 된다. 산업융합의 주체는 기업이지만, 이들이 융합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고 상용화하는 데 장애가 되는 제도적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산업융합촉진법은 이러한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다.

1980년대 히트했던 영화 ‘부시맨’엔 부시맨들이 콜라병을 처음 보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장면이 나온다. 융합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기존 법령이나 규정이 담지 못했던 새로운 융합 신제품이 나타났을 때, 어느 법령이나 규정을 적용시켜야 할지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한다면 그런 부시맨과 다를 바 없다. 이로 인해 새로운 융합 신시장을 선도할 기회를 다른 나라에 빼앗긴다면 더 이상 웃을 일만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산업계의 부시맨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라도 산업융합촉진법 제정은 꼭 필요한 작업이다.

최경환 지식경제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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