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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리뷰] '허드슨 강변에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5면

'이 해 양력 3월 2일, 베이징 시내의 도로 양옆에 언 얼음은 아직 녹지 않았다. 날씨가 그렇게 추운 것은 아니었지만 나뭇가지에 아직 싹도 나지 않은, 아직 밖에서 활동하기 좋은 계절은 아니었다. (중략)황제 폐하가 오조(午朝)를 거행한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대로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문무백관들은 감히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고 즉시 황성으로 내달았다. 가마를 탄 고위 관리는 그래도 가마 위에서 관복과 관모를 정리할 시간이 있었지만…' .

이렇게 시작하는 레이 황(중국명 黃仁宇)의 저작 『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를 읽었을 때 기자는 '어찌하면 역사를 이렇듯 재미나게 풀어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적이 있다.

미국에서 활동한 중국 역사학자 레이 황은 단편적인 주제보다는 커다란 시각에서 역사를 살피고, 아울러 그 속에 숨어 있는 유익하며 흥미진진한 사실(史實)을 책으로 엮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이번에 국내에 번역돼 선보이는 그의 또다른 저작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 역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를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이냐에 대한 그의 고민이 절절이 담겨진 책이다.

특히 오랜 시간과 거대한 부피가 한 데 엉켜 있는 복잡한 중국사를 그가 앞세우는 체제의 효율성, 사회 구성인원들이 보이는 사고의 현실성 여부 등 몇 가지 거대 시각을 통해 간결하게 풀어냈다.

현재를 살아가는 중국인들은 자신의 역사 속에서 지난 날의 영광과 함께 오늘날의 좌절을 떠올린다. 거대 제국을 오랫동안 유지했으면서도 근세기에 접어 들어 서양의 문물에 밀려 형편없이 뒤떨어졌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중국인 뿐이 아닐 것이다. '동양' 이라는 단어가 지닌 복고적인 향수에 취하면서 한편으로는 서양에 뒤떨어진 동아시아의 오늘날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지식대중도 그러하기는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역사와 21세기 중국』이라는 저작에서도 드러났듯이 저자가 중국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우선 비판적이다.

제왕의 권력과 집중화한 관료 시스템이 권력이 아래로 분산돼 평균적인 사회로 발전하는 흐름을 가로 막았고, 부분적으로 싹트기 시작했던 상품경제도 권력의 지나친 중앙집중으로 제도화.평균화하는데 실패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의 이같은 시각은 신간에서도 주요 흐름을 형성한다. 진(秦).한(漢)시기에 세계적인 제국으로 틀을 잡았던 중국이 복잡한 왕조 교체의 흐름을 반복하면서 성숙한 제도를 정착시키는데 실패한 것은 결국 위와 같은 문제를 풀어가지 못한 데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책을 읽다 보면 '왜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한다는 것일까' 에 대한 답이 나온다. 저자가 발을 딛고 있는 미국이란 땅은 자본주의의 완결이라고는 할 수 없더라도 그 첨단을 걷는 곳이다.

자본주의를 오랫동안 화두로 지니고 역작을 선보였던 저자는 '중국은 왜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근대성을 체제 안에서 꽃피우지 못했을까' 라는 문제를 자본주의가 화려하게 자리잡은 미국의 땅, 허드슨 강변에서 되돌아 보고 있는 것이다.

책은 그래서 문명비판서에 가깝다. 성세(盛世)라고 일컬어졌던 한무제(漢武帝), 당태종(唐太宗)때의 업적도 저자의 날을 세운 칼날 앞에 잘게 부서져 다시 조합된다.

한대 행정체계가 동중서(董仲舒)의 음양오행이란 관념적 사유로 덧칠돼버린 점, 송대에 발전한 도학이 역시 관념적 사유를 이끌어 실질적인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은 점 등이 하나하나 꺼내져 비판대에 오른다.

중국사, 나아가 동아시아사를 오늘날의 현상과 연결시켜 성찰하려는 이들에게 매우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미국으로 상징되는 근대 이후 서양사회의 자본주의적 성공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는 저자의 태도가 다소 눈에 거슬린다.

유광종 기자

*** 저자 레이 황은…

레이 황은 지금도 중국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역사학자다. 국민당군에 몸담았다가 기자생활을 거쳐 미국에 연수했고, 고단한 생활을 거쳐 세계적인 명망을 얻기까지의 경력도 매우 다채롭다. 대만과 홍콩에서 일었던 '레이 황 열기' 는 중국에서도 번져나가고 있다.

그의 저작은 오래 삭은 젓갈처럼 맛깔지다. 그리고 치밀한 사료 섭렵과 방대한 지식이 한 데 어울려 명쾌한 시각을 선보인다. 명쾌하다는 것은 달리 말하자면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도 그의 시각에서는 단순한데서 오는 방만함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많은 것을 두루두루 소화한 뒤에 나타나는 고명(高明)함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의 저작에는 많은 정보와 함께 재미, 진지한 성찰 등이 담겨 있다. 『허드슨 강변에서…』는 중국역사를 말하고 있지만 단순히 그 곳에만 머물지 않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그 속에는 중국의 제도와 경제, 철학과 종교, 제왕적 삶과 일반 민중의 생활사, 전란과 기아, 기후와 농사 등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들어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문명사의 허점을 낮게 질책하는 목소리도 담겨 있다. 그래서 재미를 주고, 역사를 멀리 되돌아보는 여유를 함께 선사한다.

이 책은 학문적인 성취를 토대로 한 역사연구가 어떻게 독자대중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까를 보여준다.

상아탑의 역사서술이 그를 읽어야 할 사람들로부터 아직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형편에서는 차라리 하나의 가능성으로도 비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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