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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만 1조2300억원 글레이저의 덫에 걸려 경쟁력 시름시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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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호 24면

영국 축구팬들은 맨유가 번 돈을 빼내 빚 갚기에 열심인 구단주인 맬컴 글레이저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사진은 기업사냥꾼 글레이저가 맨유를 인수한 2005년, 팬들이 ‘맨유는 안식을, 글레이저는 지옥에서 썩기를!’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펼쳐 보이고 있는 모습.

미국의 수전 팰루디(51)는 1991년 퓰리처상(해설보도)을 받았다. 월스트리트 저널(WSJ)을 통해 월가의 차입매수(LBO) 이면을 추적해 보도한 공이었다. 차입매수는 빌린 돈으로 벌이는 기업 인수합병(M&A)이다. 팰루디의 기사에는 로버트 캠푸, 폴 키팅, 이반 부스키, 그리고 맬컴 글레이저 등 차입매수꾼들이 빌린 돈으로 기업을 사냥하는 장면과 포획된 기업이 그들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허덕이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영지표 보니 성적 알겠네”

올 4월 초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최고 구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홈구장인 올드트래퍼드 앞에서 시위대가 “기업 사냥꾼 글레이저는 물러나라(Corporate Raider, Glazer Out)!”고 외쳤다. 그들이 말하는 글레이저는 1980년대 유명한 차입매수꾼이면서 맨유의 구단주인 맬컴 글레이저(82)다. 19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그의 악명이 대서양 건너편 영국에서 되살아난 셈이다.

시위대는 맨유의 적극적인 팬들인 ‘붉은 기사단(레드 나이츠)’이었다. 그들은 맨유가 유럽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패배하자 구장으로 몰려들었다. 챔피언스리그는 유럽 최고 축구클럽들이 해마다 벌이는 대회다. 맨유는 2007~2008시즌 우승에 이어 지난 시즌에는 준우승했다. 붉은 기사단은 “글레이저가 빚으로 맨유를 사들인 뒤 뛰어난 선수를 팔아 부채를 갚는 바람에 팀 경쟁력이 약화됐다”며 “챔피언스리그 8강전 패배가 그 증거”라고 주장했다.

원죄는 2005년 적대적 인수합병
시위대는 곧잘 과장법을 쓰곤 한다. 하지만 붉은 기사단 주장 가운데 상당 부분이 사실로 확인됐다. 맨유는 지난해 6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25)를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에 팔아넘겼다. 그는 2007~2008 챔피언스리그와 영국 프리미어리그 우승의 주역이다.
호날두를 매각하기로 한 결정은 감독인 알렉스 퍼거슨(69) 등 코칭 스태프의 판단은 아니었다. 당시 영국 언론은 맨유의 모회사인 레드풋볼의 재무팀을 지목했다. 그들은 구단주 글레이저의 금고지기들이다. 이들이 전면에 나선 절박한 속사정이 있었다. 2009년 적자를 막는 일이었다. 적자가 나면 한 해 뒤인 2010년 1월 예정인 채권 발행이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수익을 내지 못하는 회사에 누가 돈을 꿔주려고 하겠는가.

사실 지난해 맨유는 5000만 달러 정도 적자였다. 호날두를 넘겨주고 받은 이적료 1억2240만 달러(약 1370억원) 덕분에 7370만 달러 흑자로 2009년 장부를 꾸며놓았을 뿐이었다. 글레이저의 금고지기들은 회계 전문가들이 말하는 ‘창조적 숫자 놀음(덜 노골적인 분식회계)’을 좀 한 셈이다.

그 결과 올 1월 맨유는 채권 발행에도 성공했다. 연 8% 정도 이자를 주는 조건으로 5년 만기 채권 7억6000만 달러어치를 발행했다. 초저금리 시대에 보기 드문 고금리다. 미 투자은행 JP모건과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이 인수해 고수익을 좇는 펀드들에 넘겼다. 맨유와 모회사인 레드풋볼은 한숨 돌렸다. 채권 발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면 맨유는 부도위기를 맞을 상황이었다.

채권을 발행했는데도 맨유 부채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맨유와 레드풋볼은 산더미 같은 빚에 깔려 있다. 부채 규모가 11억 달러(1조2300억원)에 달한다. 프리미어 구단 가운데 가장 많다. 원금과 이자를 갚는 데만 해마다 6400만 달러(710억원)가 나간다. 맨유의 부채 장부에는 2억6800만 달러의 악성 부채가 있다. 전체 빚 가운데 24%에 달하는 규모다. 금리는 연 14% 수준이라고 가디언지는 보도했다. 더욱이 복리구조다. 이자가 해마다 원금에 합산돼 만기인 2017년에 한꺼번에 상환하는 방식이다.

호날두 팔아 겨우 적자 면해
맨유의 부채는 2005년 이후 빠르게 늘었다. 그해 맨유가 차입매수꾼 글레이저의 수중에 떨어졌다. 2년에 걸친 치밀한 토끼몰이 결과였다.

글레이저는 2003년 맨유 지분 3.17%를 확보하면서 적대적 인수합병을 선언했다. 경영진과 일부 주주가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저돌적인 공세를 막지는 못했다. 그해 말 그의 지분은 15%로, 이듬해인 2004년 말에는 30%로 늘어났다. 한 해 뒤인 2005년 5월 마침내 글레이저는 지분 98%를 확보하는 것으로 맨유 사냥을 마쳤다.

그의 인수 기법은 80년대식 차입매수 수법이었다. 그는 레드풋볼이라는 회사 이름으로 정크본드를 발행했다. 월가 투자은행을 통해 헤지펀드에 떠넘겼다. 유동성 풍년 시절 저금리에 시달리던 헤지펀드들에 금리가 연 14%나 되는 글레이저의 정크본드는 복음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조달된 자금이 모두 7억8000만 달러였다. 글레이저가 맨유 사냥에 투입한 자기 자금은 4억2000만 달러밖에 안 됐다.

글레이저는 맨유를 포획한 직후 곧바로 상장을 폐지했다. 이것도 차입매수꾼들이 즐겨 쓰는 수법이다. 상장을 폐지해야 인수과정에서 끌어들인 부채를 손쉽게 피인수 기업에 떠넘길 수 있기 때문이다. 상장을 유지하면 다른 주주들의 반대 때문에 부채 떠넘기기를 쉽게 할 수 없다.

맨유를 인수한 이듬해인 2006년 글레이저는 맨유 이름으로 채권을 발행했다. 7억6000만 달러를 조달했다. 유동성 거품이 한창이어서 채권을 발행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는 이 돈 가운데 상당 부분을 맨유를 사들이면서 헤지펀드들한테서 빌린 돈을 갚는 데 썼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맨유가 모회사인 레드풋볼을 지급보증하고 있다.

맨유는 한때 비즈니스 세계의 아이콘이었다. 최고의 성적을 바탕으로 다양한 마케팅을 벌여 매출액을 올렸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맨유에게 배워라라는 책이 출판될 정도였다. 글레이저 치하의 맨유는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명성을 떨쳤다. 매출액이 빠르게 늘어났다. 올 시즌이 끝나면 프리미어리그 팀 가운데 처음으로 매출액이 3억 파운드(4억6000만 달러)를 넘어설 전망이라고 BBC방송이 최근 보도했다. 겉보기엔 뛰어난 경영실적이다.

그러나 기업 가치를 유지·성장시키기 위한 투자가 제자리 걸음이다. 지난해 매출액 가운데 선수 등의 연봉으로 나간 비율은 40% 남짓이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최하위 수준이다. 맨유가 벌어들인 돈이 회사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지지는 못한 것이다. 상당 부분이 회사 밖으로 흘러나가 구단주의 부채 상환에 쓰였다.

이는 80년대 차입매수 사냥감으로 전락한 미국 기업들이 나중에 껍데기만 남은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차입매수꾼들은 사들인 기업을 활용해 빌린 돈을 갚으면서 알짜 자산을 마구 팔아치웠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팰루디는 “차입매수꾼은 투자 이익을 회수하기 위해 회사 자체를 갉아먹는 일도 불사한다”고 말했다.

팰루디가 경고한 사건이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실제로 벌어졌다.
포츠머스 구단이 2월 파산을 선언했다. 112년 전통을 자랑하고 2년 전 영국 축구협회(FA)컵을 거머쥔 포츠머스는 구단 소유권이 러시아 부호→두바이 갑부→사우디 재벌 순으로 이전되는 과정을 겪었다. 그 사이 포츠머스는 구단주들의 빚을 떠안았다. 핵심 자산(주전 선수)을 잇따라 팔아치워야 했다. 결국 껍데기만 남은 구단은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반면 빚이 적은 스페인 구단들은 투자를 늘려 유명 선수들을 대거 사들이고 있다. 프로구단의 경쟁력은 스타를 중심으로 한 경기력이다. 좋은 성적을 거둬야 관중이 늘고 텔레비전 중계권료가 오른다.

비슷한 이유로 포츠머스 올2월 파산
맨유의 경쟁 팀 첼시는 후덕한 구단주의 덕을 봤다. 한때 부채가 10억 달러를 넘었다. 채권자는 구단주인 러시아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였다. 부를 과시할 목적으로 첼시를 사들인 그는 대대적으로 출자전환을 단행했다. 쥐고 있는 채권을 내놓고 첼시 구단의 주식을 받은 것이다. 첼시 부채는 1억720만 달러 수준으로 줄었다. 아브라모비치는 앞으로도 출자전환을 단행해 구단 재무구조를 좀 더 탄탄하게 만들겠다고 말했다.

맨유는 첼시처럼 구단주의 은총을 기대하기 힘들다. 오히려 구단주가 떠넘긴 부채는 대부분 2013~2016년 사이에 갚아야 한다. 그때 미국·영국 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나 호황을 구가하면 부채 상환은 큰 문제는 아니다. 주요 스폰서들인 글로벌 기업들이 거액을 주고 맨유와 후원계약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가 지지부진하다면 “맨유가 제2, 제3의 호날두를 팔아 빚을 갚아야 할 수도 있다”고 영국 텔레그래프지는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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