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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my LIFE] ‘붓 잡은 의사’ 20여 년 … 이제 의술을 화폭에 담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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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바뀐 그림 소재 때문에 주위서 많은 말을 듣는다”는 장인성 성모피부과 원장. 그는 의사보다 화가로서의 인생이 더 길 것으로 생각한다. [조영회 기자]

전문인은 아름답다. 그 열정이, 그 치밀함이…. 각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일궈 낸 지역 주민들을 소개한다. 성공했거나, 일가(一家)를 이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글=조한필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천안 신부동 종합버스터미널 옆의 성모피부과의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왼쪽은 간호사들이 있어 병원임을 알겠는데, 오른쪽은 회화작품으로 꾸며진 화랑이다. 진료실에서 장인성(54) 원장을 만났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인터뷰를 청했다. 진료실과 통한 문을 여니 조그만 화실 겸 그만의 공간이 나타났다. 10평 남짓했다. 이젤과 캔버스·물감 등이 눈에 띈다. 영락없는 화실이다.

그런데 벽에 붙은 서가에는 피부과와 미술관련 책이 섞여 꽂혀 있다. 화가인지 의사인지…. “의사가 본업이시죠?” “예. 그렇지만 화가이기도 합니다.”

그렇다. 그는 의사의 길을 들어선 의대 시절이후에도 한번도 붓을 놓은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해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붓을 잡았다. 그러니 그의 그림 인생이 40년은 족히 된 듯하다.

지역 화단에서 ‘화가 장인성’은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충남미술대전 운영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현재 시형회·충남구상작가회 회원이고 충남미술대전 초대작가다. 초대작가는 3회 이상 특선한 작가에게 주어진다.

이 경력만 보면 그는 분명 화가다. 그는 천안에서 피부과를 개업한지 20여 년 되는 고참급 개원의다. 충남대 의대를 졸업했고 오래전 순천향대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도 땄다. 그는 이 두 직업을 어떻게 꾸려나갈까. 그는 1988년 개원 이후 세 번 병원을 확장 이전했다. 그 때마다 화실 공간은 늘어났다. 그러더니 2002년 갤러리를 갖춘 지금의 피부과의원을 선보였다.

땅 그리던 화가, 피부를 그리다

장인성 ‘땅위에서’(2007년)

요즘 두 직업이 합쳐졌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의 그림 소재가 바뀐 걸 두고 하는 말이다. ‘땅 화가’에서 ‘피부 화가’로. 20여 년간 땅만 보고 다닌 그에겐 엄청난 변화다. 땅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난 것일까.

그는 산 중턱의 밭을 주로 그려왔다. 땅의 생명력에 깊이 빠져 있었다. “땅은 사람을 나고, 또 사람이 죽은 후 그 주검을 자신의 품으로 받아들인다. 말없이 모든 걸 감내하는 땅에서 우리의 어머니를 느낀다. 또 땅의 굴곡, 주름에서 어머니의 숨결과 여인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 정도면 투박한 땅에서 정말 많은 걸 끄집어 낸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부터 장 원장은 피부과 전문의 직업에 충실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피부 속을 화폭에 담고 있다. 색감도 어두운 땅 색에서 핑크색 톤으로 바뀌었다. 예전 땅 위에 얇게 깔린 눈(잔설)을 그려 밝은 분위기를 내기도 했지만 이렇게 환한 그림을 그린 적은 없다.

요즘 의원 내 화랑엔 두 대조적인 화풍의 그림들이 섞여 걸려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눈을 의심하기도 한다. 피부 속이라는 느낌은 언뜻 들지만 ‘설마 그걸 그렸을까’ 하면서. ”

비(非)구상은 절대 아니란다. 피부 속 조직을 조금 과장해서 그리긴 했다. 이런 달라진 화풍에 주위에서 한마디씩 한다.

“역시 ‘의사 그림쟁이’는 못 속이는 구먼.” “누드를 잘 그리더니 이젠 아예 누드 속으로 들어갔네.” 그는 천안 목요누드크로키 회원으로 10여년간 여인의 몸을 그렸다.

연 1회 개인전, 10회 이상 그룹전

그는 10여 년 동안 연 1회 개인전을 열고, 연 10회 이상 그룹전에 참여하고 있다. 의사 화가로선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편이다. 주로 천안·대전·서울 등에서 전시회를 갖지만 2001년엔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한국의사미술회전’‘그림 그리는 의사들전’ 등 의사 화가들 전시회에는 꼭 참여한다.

땅을 그리던 때는 병원이 쉬는 주말엔 꼭 시골로 땅 스케치를 갔다. 그런 그에게 부인은 큰 불평을 하지 않는다. 결혼할 때부터 그림에 빠진 남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부인이 스케치 여행에 따라 나서기도 한다. 요즘 그림 소재를 피부로 전환하면서 주말 여행이 크게 줄었다. 집에서 몹시 좋아한다.

2002년 수원에 있는 경기대 조형대학원을 다녔다. 정식 그림 공부는 처음이었다. “내 속에 든 걸 다 그린 것 같고 텅 빈 생각이 들어 뭔가를 채우려 학교로 갔다”는 그는 일주일 두번씩 오후 진료를 접고 학교에 갔다. 지금껏 그림을 그리면서도 의사 업무에 소홀하지 않았는데 학교에 다니니까 환자를 덜 보게 되게 돼 금세 수입이 줄어들더란다.

미대 다니는 둘째 아들 보면 흐뭇

가끔은 그림으로 돈을 벌기도 한다. 개인전을 열면 그림 두서너 점은 꼭 팔린다. “논산서 함께 초등학교를 다닌 동기생 건축사가 내 그림(땅 그림)을 보면 고향 생각이 난다면 서너 점을 샀다.”

그의 그림 값은 얼마나 될까. 호당 15만원선. 중견작가치곤 싸게 받는다. 보통 20호 안팎의 그림이 팔리니 한 점 300만원은 된다는 얘기. 그림 값에 연연하지 않는다. 직업이 의사이기도 하니 남보다 넉넉한 환경에서 그림을 그린다.

둘째 아들이 미대에 다닌다. 자신은 미대에 가게될까봐 고교(대전고)시절 미술부가 손짓했지만 들어가지 않았는데…. 아들이 가는 건 말리지 않았다. 뭘 그리는지 관심은 가지만 부담을 느낄까봐 내색은 하지 않는다. 캔버스를 슬쩍 가져가 사용하기도 하지만 뭐라 하지 않는다. 학생이 사용하기에 비싼 캔버스이긴 하지만. 미술가의 피를 잇고있는 아들이 대견스럽다.

장 원장은 의사보다 화가의 길이 더 길 것으로 본다. 늙어서 병원은 접어도 붓은 놓지 않을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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