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만난 사람] 동양학 가르치는 조호철 박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학교에서 배우는 건 온통 서양 것뿐이고…침체돼가는 동양학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 없었습니다.”

동양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의 하소연이 아니다.서양학문을 공부한 정신과 의사 조호철(曺晧哲 ·54)박사의 첫 마디다.

동양학 재건과 대중화에 쏟는 그의 열정은 유별나다.

曺원장은 요즘 본업 외에 주역(周易) ·논어(論語) ·중용(中庸) 등 경서(經書)를 가르치는 일에 푹 ‘빠져’ 있다.

원장실을 들어서면 벽면은 온통 한문책으로 가득하다.원장실은 낮에는 진료실이지만 이른 아침시간과 저녁시간엔 강의실로 탈바꿈한다.현대판 서당이다.

대학교수 ·법조인 ·의료인 ·교사 ·주부 ·학생 등 다양한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5년전부터는 아예 영남일보 빌딩에서 시민강좌를 열고 있다. 이곳을 거쳐간 사람만도 벌써 1천여명에 이를 정도.

그가 즐겨 가르치는 과목은 경서공부의 마지막 단계라는 주역. 한자만 빽빽한 원전을 글자 하나 빼놓지 않고 구수한 입담에 실어 새겨 나간다.그의 주역 강의는 대구 바닥에 이미 정평이 나 있다.대학에서 주역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그로부터 한수 배울 정도다.

曺원장이 동양고전연구소(053-754-0025)를 설립한 것은 1996년.힘들여 경서를 깨친 뒤 그 깊은 맛을 알고는 혼자 간직하는 것이 아까워서였다. 제도권 교육이 할 수 없는 인성교육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꿈도 있었다.

“고전 읽기를 확산시키면 죽어가는 동양학을 살리지는 못해도 ‘찌그러드는’ 속도를 늦출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내친 김에 지난해는 사재 1억원을 털어 회원 2백80여명으로 사단법인 동양고전연구회도 설립했다.

영어와 서양학문에 길들여진 그가 한문과 동양학에 심취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고전과 인연을 맺은 것은 70년대 후반 군의관 시절.그때까지만 해도 사서삼경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의사공부에만 쫓겨오다 자신을 돌아볼 무렵 우연히 동양고전 강의를 들은 것.

운좋게도 이후 내로라하는 김병호 ·이완재 선생 등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다.정신의학이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이어서 동양의 인간관을 알기 위해 주역과 고전 공부에 매달렸던 것. 그의 주역 공부 비결.

“주역은 주어 ·목적어 ·술어를 명쾌하게 밝히는 영어문장과 달리 생략이 많습니다.읽고 읽어도 대체 주어 등을 찾을 길이 없어 영국인 제임스 레그가 쓴 영역본 주역을 읽게 됐어요.신통하게도 눈이 뜨입디다.”

그래서 요즘은 강좌에 영문경전 읽기도 곁들인다.

사단법인은 주요사업으로 우선 제대로 된 한글경전을 펴낼 참이다.그동안 그가 번역본을 뒤적이며 내린 결론이다.너무 빈약하더란 것.번역본엔 강의중에 나온 이야기도 곁들일 계획이다.

그는 이번 가을에 2층 병실 70여평을 강의실로 개조할 생각이다.

나이 때문에 이젠 많은 환자를 돌보기 어려운 데다 고전 대중화 붐이 일었을 때 여세를 몰아가자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다고 曺원장은 책만 끼고 사는 벽면서생은 아니다.젊었을 적엔 암벽등반과 골프 ·스킨스쿠버에 빠졌고,지금도 술자리라면 마다하지 않는 의사다.

송의호 기자

*** 조호철 박사는…

▶1947년 경남 합천 출생

▶62년 경남 거창농림고 졸업

▶71년 경북대 의대 졸업

▶81년 의학박사(경북대)

▶71∼76년 경북대병원 신경정신과 전공의

▶79∼현재 조&박신경정신과 원장

▶96년 동양고전연구소 설립

▶2000년 사단법인 동양고전연구회 설립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