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 칼럼] 햇볕에서 햇빛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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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울 거리에서 "사장님" 하고 부르면 앞에 가던 사람들이 모두 뒤돌아 본다는 농담이 돌던 때가 있었다. 그 누군가가 그 누군가를 '반통일 반개혁 수구세력' 이라고 부르자 어찌된 까닭인지 많은 보통 사람들이 자기를 그렇게 부른 줄로 알고 부른 사람의 정체를 찾고 있다. 이것이 계기가 돼 색깔 논쟁 또는 남남 갈등이 본격화됐다.

이보다 먼저 싹튼 것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과 개혁 가운데 사회주의적인 부분이 신호등에 걸리거나 실패하고 있다는 의식이었다. 이 의식은 김대중 지지편과 반대편이 공유했다. 지지편의 교만한 자신감에는 초조감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 초조감이 대상 불분명한 '반통일 반개혁적인 수구세력' 이라는 공격을 만든 것 같다.

*** 남쪽 반통일 세력은 없어

의식이 있는 데는 어디에나 언제나 갈등이 등장한다. 가장 친밀한 관계인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에도 엄청난 갈등이 있다. 오히려 가까울수록 갈등의 가짓수도 많고 크기도 크다. 자본과 노동 사이, 북한의 주체사상과 남한의 자유주의 사이에만 갈등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갈등이 없는 상태는 허구일 뿐 현실이 아니다. 색깔 논쟁이나 남남 갈등을 큰일 난 것처럼 과장할 것은 없다.

갈등은 해소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 옳다. 지지고 볶고 사는 것을 정상으로 여기자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사라지는 갈등도 있고 새로 생기는 갈등도 있다. 화합은 항상 새로운 갈등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결혼이 그 좋은 예다. 결혼하지 않았으면 없었을 갈등이 결혼을 했기 때문에 생긴다.

햇볕정책도 처음에는 화합 쪽이 돋보였다가 지금은 갈등을 더욱 만들어 내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남한으로부터 받고 싶어 하는 2백만㎾의 송전은 金대통령이 햇볕정책을 선언하지 않았던들 십중팔구 요구할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래저래 이 전기를 줄 수 없으니까 거기서 새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

나는 남한에 반통일 세력은 없다고 본다. 자유주의, 즉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남한만이라도 완벽하게 유지하는 통일을 바라는 사람은 절대 다수다. 이 사람들이 아직은 연방제를 반대하는 것이다. 주체사상은 통일지상주의, 사회주의, 김일성 부자의 세습 독재를 내용으로 한다. 자유주의는 북한의 주체사상을 구성하는 이 세개의 요소 가운데 사회주의 경제와 김정일 독재, 이 둘과 상치(相馳)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주체사상은 김정일 독재가 그 전부다. 통일지상주의와 사회주의는 사족에 불과하다. 김정일 독재가 입은 옷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옷은 없어도 김정일 독재만 있으면 주체사상이 성립하지만, 김정일 독재가 없이 옷만 있는 주체사상은 있을 수 없다.

햇볕정책의 목표가 주체사상이라는 외투를 김정일 위원장의 몸에서 벗겨내는 데 있다면 이것은 원천적 오류다. 외투가 아니라 김정일 자체가 주체사상이기 때문이다. 햇볕으로 그를 덥게 해도 소용없다. 몸을 몸으로부터 벗겨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의식이라는 햇빛이다. 한 때는 햇볕 얘기가 유행했다. 지금은 햇빛의 때다. 볕은 따뜻함이고 빛은 밝음이다.

*** 생산적 색깔논쟁이 돼야

햇볕정책이 햇볕 지지편에게 가져 온 가장 실망스러운 부산물은 앞에 말한 초조감이다. 이 초조감이 개혁은 사회주의적인 것이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만드는 것 같다. 북한의 외투를 벗기지 못하니까 우리 쪽이 차라리 북한처럼 외투를 입자는 상사지향(相似指向)심리의 한 부분이다. 공산당이 독재하는 중국에서조차 개혁은 사회주의와 관료주의를 떠나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이런 무의식적 초조감은 한동안 확대될 수도 있다. 그 속에서 무책임한 발언이 가지를 칠 수 있다. '반통일 반개혁적 수구세력' 이라는 전체 남한 인민을 상대하는 도전도 나오고 '만경대 정신을 이어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 는 전체 남한 인민을 반대 쪽으로 의식화시키는 글도 나온다. 그래 놓고는 '그런 말 한 적 없다' 나 '그런 것을 가지고 뭘!' 로 대응하는 것으로는 의식의 햇빛을 가릴 수 없다. 차라리 색깔 논쟁을 절도 있게, 그리고 생산적으로 활성화하자.

강위석 <월간 emerge새천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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