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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7) 기민한 미군의 전차 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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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50년 9월 초 낙동강을 건넌 미군들이 M-26 퍼싱 전차에 올라타고 진군하고 있다. 전차는 6·25 전쟁 기간 중 연합군의 핵심 무기체계로 등장해 북한의 T-34 전차에 대적할 화력을 아군에 제공했다. 전쟁 초기 한반도에 상륙한 미 M-26 퍼싱 전차는 성능 면에서 북한군 T-34와 비슷했으나, 나중에 보급된 M-46 패튼 전차는 전차포 구경과 철판 두께 등에서 북한군 전차를 압도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1950년 10월 12일 아침 우리는 전차를 앞세우고 길을 떠났다. 거침없이 개성 북쪽에 있는 황해도 장풍군(45년 11월에 장단군과 개풍군의 일부를 떼어 만든 군) 구화리를 빼앗고 금천군의 시변리로 향했다. 나는 1번 전차 위에 올라탔다. 길을 떠나기 직전, 미 수석고문관 헤이즈레트 중령이 반대했다. 적의 저격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나는 선두에 서기로 했다. 고향인 평양을 탈환하는 중요한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적은 가끔씩 계곡 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공격을 해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공군의 폭격을 부르고, 포병이 원거리 사격에 나서는 작전을 펼치면서 진군하고 또 진군했다.

보병은 밤낮 없이 걸었다. 발이 부르터서 절뚝거리는 병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기 진작을 위해 나는 행군 도중에 그들에게 자주 다가갔다. 내가 “평양”이라고 외치면 사병들도 목이 터져라 “평양”을 외쳤다. 나는 늘 연대장과 각급 부대장들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빨리 빨리 움직여-”라고 재촉했다. 이틀 먼저 길을 떠난 미 1기병사단을 따라잡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빨리, 빨리”는 당시 국군 1사단의 구호처럼 돼버렸다.

배속된 미군들도 우리 1사단 장병들이 “전진하자”고 외치면 “위 고(We go: 우리도 간다)”라고 화답했다. 1사단과 함께 움직이는 미군 전차와 포병 대원들도 어느덧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그 도중에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이 준장으로 승진해 부사단장이 됐다. 후임으로 조재미 중령이 15연대장을 맡았고, 최대명 소령이 그 밑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우리가 향하던 시변리는 북한군이 남침할 때 후방 보급기지를 설치했던 곳이다. 13일 낮에 12연대와 삭령으로 우회한 15연대가 협공해 북한군을 제압하고 시변리를 점령했다. 보병과 전차를 잘 결합해 이룩한 멋진 승리였다. 소식을 듣고 미군 제6 전차대대 D중대가 자진해서 국군 1사단의 북진 행렬에 참여했고, 뒤이어 대대장 존 그로든 중령도 대대 지휘본부를 이끌고 합류했다. 우리 1사단은 졸지에 50대에 달하는 미군의 전차를 확보하게 된 셈이다.

그 덕분에 우리 1사단의 진군은 정말 거칠 게 없었다. 밤에 작전을 꺼리는 미군 전차부대를 숙영하게 한 뒤 국군은 계속 길을 걸었다. 미군 전차는 다음날 동이 튼 뒤 빠른 속도로 우리 뒤를 쫓아와 다시 행렬에 합류하는 식이었다.

우리는 신계와 수안~율리를 돌파해 평안남도에 들어섰다. 10월 17일 평양 외곽 30㎞ 지점인 평남 중화군 상원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평양에 가까워지면서 북한군의 저항이 이어졌다. 상원에 진입하던 길목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미군 전차를 앞세우고 우리는 계속 진격을 하고 있었다. 미군 전차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던 길은 그 앞쪽에서 급히 휘어져 있었다. 그 전면에서 갑자기 북한군 전차 열다섯 대가 나타났다. 아주 위급한 순간이었다. 우리는 휘어져 시야가 가려진 길을 돌자마자 준비 없이 적 전차와 마주선 것이었다. 나는 맨 앞 전차에 올라탄 상태였다.

미군은 신속했다. 내가 올라탄 전차의 소대장이 급히 무전으로 뒤의 전차와 교신을 하더니 아주 빠른 속도로 후진하기 시작했다. 미군 전차는 모두 길 양쪽으로 흩어져 내려섰다. 미군의 전차에 탑재된 포신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서도 그 과정을 세심하게 지켜봤다.

미군 전차는 먼저 적 전차 열다섯 대 가운데 맨 앞과 뒤의 전차만을 공격했다. 적의 전차는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반격이 너무 빨랐기 때문이었다. 미군 전차로부터 날아간 포탄이 적의 맨 앞 전차와 뒤의 전차에 몰려가는가 싶더니 불길이 솟기 시작했다. 선두와 맨 뒤의 전차가 곧 무너졌다. 그 중간에 있던 적 전차 열세 대는 기동을 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못하는 ‘독 안에 든 쥐’ 꼴이었다. 마침내 미군 전차는 이들 나머지 열세 대를 겨냥해 불을 뿜었다. 적의 전차에서는 전차병들이 손을 들고 기어 나왔다. 곧 투항한 것이다.

성능에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미군과 북한군의 전차였지만, 급한 상황에서 그를 다루는 솜씨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났던 것이다. 미군의 대응력은 그렇게 강했다. 추잉검을 씹으면서 흥얼대고, 때로는 몸을 비틀거리면서 춤도 추는 미군들이다. 그러나 조직으로 묶일 경우 미군은 늘 강했다. 지휘관은 늘 제자리를 죽음으로서라도 지키려고 노력했고, 자유분방한 모습의 사병들도 상황이 발생하면 고도의 긴장감 속에서 제 임무를 완수하는 군대였다.

그런 미군의 순간적인 기동과 잽싼 공격력을 눈앞에서 지켜보니 든든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미군은 밤에 약했다. 어두운 밤이면 움직이기 싫어하는 군대였다. 낮에는 늘 활발하 게 움직이지만 밤만 되면 뭔가 달라 보였다. 반드시 휴식을 취하려 했고, 가능하면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그런 미군은 당시 내게 큰 관심거리이자 연구 과제이기도 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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