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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생태계 변해야 미래 있다 <하>R&D 국가 컨트롤타워 시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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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지난해 4월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과학기술위원회 회의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21일 과학의 날을 맞은 과학기술계의 분위기는 냉랭하다. 과학기술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관심이 큰 데도 그렇다. 그는 현직 대통령으론 처음 KAIST 학위수여식에 참석했고, 다른 분야 예산이 깎일 때도 연구개발(R&D) 예산은 지켜주려고 애썼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자들은 신바람 내며 좋은 연구성과를 쑥쑥 내놔야 옳다. 하지만 분위기는 그렇지 못하다. 현 정부 들어 과학기술 부처가 교육 부처와 합쳐지면서 사령탑 기능이 약화된 가운데 부처마다 과학과 연관된 ‘혁신정책’을 쏟아내 어지러울 지경이다.

◆총괄 조정기능 부재=현 정부는 과학계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던 과학기술부를 교육인적자원부에 통폐합해, 대통령이 위원장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이하 국과위)마저 ‘종이 호랑이’로 만들어 버렸다. 1999년 설립된 국과위는 명목상 과학기술의 국가 최고 의사결정 기구다. 그러나 R&D 나라 예산의 3분 2 이상을 쓰는 교육과학기술부·지식경제부를 비롯해 그 어느 부처도 국과위의 존재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교과부의 ‘R&D시스템 선진화 방안’이나 지경부의 ‘지식경제 R&D 혁신 방안’ 모두 국가 R&D의 미래지도를 그리는 중요 현안이지만 사전에 국과위에 올려 부처 간 시각차이를 조정하려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익명을 원한 국과위 운영위원은 “국과위는 요식적 심의기구로 전락했다”고 털어놨다. 부처마다 과학기술 관련 정책을 세워 공표한 뒤 사후에 국과위에 안을 올리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국과위 산하 운영위원회에 올려 심의하는 것으로 끝낸다. 국과위는 ‘통과위’라는 말까지 나온다. 국과위는 현 정부 2년여 기간 본 회의를 네 차례 열어 14개 안건을 처리했을 뿐이다. 다른 안건은 운영위에서 처리했다.

이러다 보니 각 부처는 독자적 과학기술 정책을 내놓기 일쑤다. “과학기술계가 사분오열된 것 같다”는 토로가 엄살처럼 들리지 않는다. 지식경제부의 최고 당국자들조차 “정부 R&D 시스템은 깨진 독에 물 붓기” “정부 연구비는 눈 먼 돈”이라는 말과 함께 국가 R&D 체제를 개혁하겠다고 의욕이 대단하다.

지경부는 관할 R&D를 총괄할 단장으로 황창규 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사장을 임명하는가 하면, 한국화학연구원 산하 안전성연구센터를 민영화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지경부 산하 정부출연연 시스템도 연내 대폭 바꾼다는 구상이다. 이런 것들은 공공 연구개발 시스템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큰 사안이지만 부처 간 또는 국과위 차원의 사전 협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각 부처가 제 갈 길을 가는 형국이다.

현 정부가 옛 과학기술부와 교육부를 합친 것은 두 부처의 기능을 조금씩 줄이면서 ‘지식공장’인 대학의 R&D를 강화하려는 뜻이었다. 하지만 여태껏 뚜렷한 성과 없이 국과위의 위상만 떨어뜨렸다는 지적을 받는다. 국과위를 받쳐주던 과기부의 혁신본부는 ‘선수(기획)와 심판(평가와 예산배분)’ 노릇을 한곳에서 한다는 지적을 받고 폐지됐다. 과기부는 교육부에 흡수된 뒤 숱한 교육 현안에 치여 그 모습마저 희미해진 상태다.

노무현 정부 때에는 과기부 장관을 부총리급으로 하고, 부처 안에 혁신본부를 둬 국과위 사무국 역할을 하게 했다. 국과위가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나름의 연구비 예산 조정과 배분 역할을 했다.


◆국과위 강화해야=과학계 최대 시민단체인 ‘바른 과학기술사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과실연)’은 21일 성명서에서 ‘국가 과학기술 컨트롤타워를 하루 빨리 재건하라’고 촉구했다. 최근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서 열린 ‘국가 R&D 정책과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발전방안 공개 토론회’ 등 여러 세미나에서도 이는 시급한 문제로 지적됐다. 정부출연연구소 박사급 연구원 단체인 사단법인 연구발전협의회가 연초 약 2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내용에도 이런 여론이 드러났다. 현 정부 들어 지경부와 교과부 두 부처로 소속이 갈린 정부출연연구소를 한곳으로 모으면 어느 기관 아래 두면 좋은가를 물었더니 ‘국과위’라는 응답이 63%에 달했다.

국가적 R&D 체제는 출연연구소만이 아니라 국·공립 연구소와 대학 등을 두루 고려해 개선해 나가야 한다. 옛 과기부를 부활하는 것은 실효성이나 현 정부의 명분을 감안할 때 과학기술계조차 현실성이 적다고 본다.

채영복 전 과기부 장관은 “국과위를 방송통신위원회처럼 상설기구로 하고, 위원장을 대통령에서 장관급으로 낮춰 실질적인 국가CTO(최고기술책임자) 역할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과위가 각 부처의 과학기술 예산을 조정해 기획재정부에서 배정받은 뒤 이를 배분하는 구조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국과위에 명실상부한 R&D 총괄 조정 기능을 맡기자는 이야기다.

국과위의 과학기술정책전문위원장인 이준승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장은 “교과부 안의 국과위 사무국을 독립시켜 여러 부처의 이해를 조정할 수 있게 하는 것도 당장 실행 가능한 일 같다”고 말했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총괄 조정 전담하는 과학기술담당 장관 둬

일본은 어떤가  일본도 우리나라에 앞서 2001년 과학기술청을 한국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문부성에 흡수시켜 ‘문부과학성’으로 개편한 적이 있다. 이에 따라 문부과학성은 기초과학을, 경제산업성은 산업기술을 총괄하는 체제가 됐다. 예하 연구소도 여기에 맞게 재편됐다. 기초과학은 이화학연구소(RIKEN)에서 맡고 그 산하에 5개 연구소를 뒀다. 산업기술은 산업기술종합연구소(AIST)에 하고 밑에 29개 연구센터를 뒀다. 지식경제부가 산업기술을, 교육과학기술부가 기초기술을 하도록 한 것이 일본과 흡사하다. 26개 이공계 정부출연연구소도 13개씩 나눠 두 부처에 관할권을 넘겼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처럼 나눠 놓기만 한 것이 아니라 총괄 조정 기능을 뒀다. 현 정부에는 이것이 제대로 돼 있지 않은 것이다. 일본은 총리가 매월 한 번씩 종합과학기술회의를 주재한다. 이를 전담하는 과학기술정책 담당 장관도 있다. 회의에는 문부과학상·경제산업상·총무상·재무상 등 국무위원과 민간위원이 함께 참여한다. 위원의 40% 이상은 민간인으로 구성하도록 돼 있다. 과학기술담당 장관과 사무국은 부처별 이해를 조정한다. 일본의 실질적 과학기술 사령탑 역할을 하는 것이다. ‘분할 속의 통합’이라는 묘수를 낸 셈이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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