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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대형 옹관 가마터 발굴 의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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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옹관묘(甕棺墓)는 영산강을 끼고 있는 한반도 서남부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는 독특한 장제(葬制)다. 하지만 옹관 묘는 역사기록의 미비와 유물의 한계 등으로 인해 대부분이 베일에 싸여왔다.

그 수수께끼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대형 옹관(甕棺) 제작 가마터가 국내 처음으로 발견됐다. 이는 삼국시대 나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고대 세력의 규명에 한 걸음 다가설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은 물론 그동안 의문 투성이로 남았던 옹관의 제작 과정, 유통 경로 등을 조명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동신대 박물관(책임교수 이정호)과 목포대 박물관(관장 최성락)팀은 이 지역에 대한 발굴 성과를 지난 19일 발표했다.

발굴팀은 나주시 오량동 산 27 일대(속칭 우두머리 산) 해발 20m되는 언덕(전체 면적 약 7만㎡)에서 대형 옹관을 구운 가마터 15개가 떼를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지난 10일부터 시굴조사를 벌인 결과 이들 가마가 그릇 소성실(燒成室)이 약간 경사지게 올라가 있고 내부가 완전히 밀폐된 이른바 '등요(登窯)' 임을 확인했다.

또 이들 가마의 소성실 바닥에서 다량의 옹관 파편이 가지런히 정리된 상태로 출토됐고 토기도 몇 점 발견 됨으로써 이 가마들에서 옹관과 함께 토기도 제작했음을 알아냈다.

동신대 이정호 교수는 "발굴지점의 북서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영산강 건너에는 옹관묘로 유명한 복암리 고분군과 반남고분군이 자리잡고 있어 이 가마터와 고분군의 상관관계를 짐작케 하고 있다" 고 말했다.

이 가마터 가운데 제9호 가마는 길이가 9m, 최대 너비 6.5m, 깊이 65㎝에 이르는 대형으로 가마 내부와 주변지역에서는 많은 수의 옹관 파편, 그릇의 찌그러짐을 방지하기 위한 토제(土製)모루, 토기 뚜껑(개배), 굽다리접시 등이 나왔다. 발굴팀은 이들 중 옹관과 토기 뚜껑류, 굽다리접시 등은 재질과 모양새 등이 나주 복암리 고분에서 나온 옹관.토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했다.

李교수는 "이번 발굴이 1차 시굴조사였기 때문에 아직 바깥으로 드러난 일부만을 확인한 데 불과한 수준이나 파는 곳마다 가마가 나타나고 있다" 며 "현재 추정으로는 이 곳 전체에 분포한 가마가 적으면 30여개에서 많으면 1백기에 달하는 삼국시대 최대 가마터가 될 수 있을 것" 이라고 전망했다.

발굴팀은 특히 한반도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옹관의 제작 과정과 유통 경로 등이 이번 발굴을 통해 상당 부분 밝혀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영산강 유역의 고대문화 주체 논란〓이번 발굴은 초기 삼국시대에 전남 나주지역 일대에서 옹관묘제를 발전시켰던 주체가 누구였는가라는 문제를 다시 제기하는 의미도 있다.

영산강 유역을 차지했던 세력에 대해서는 현재 '마한(馬韓)설' 이 통설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제3의 세력 설' 도 끊임 없이 나오고 있다.

'마한 설' 은 나주 일대의 반남고분군과 복암리 고분군에서만 옹관과 주구(周溝 : 무덤 둘레에 도랑을 친 것)형 무덤이 발견되는 점에 대해 시원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 마한의 영역이 영산강 이북의 한반도 서남 전체에 걸쳐 퍼져 있었기 때문에 나주 일대에서만 이런 유물과 유적이 발견된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이다.

역사학계 일부에서는 나주의 반남.복암리 고분군의 주구형 묘제와 금동제 신발 등 유물의 형태.재질이 일본 규슈(九州) 구마모토(熊本)지역 고분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삼국시대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한반도계 세력이 이 지역의 문명 주체였을 것이라는 설을 내세우고 있다. 참고로 나주의 반남.복암리 고분군은 시기적으로 3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일본 규슈의 고분 등은 축조시기가 5세기 무렵이다.

어쨌든 이번 옹관 가마터의 발굴을 계기로 학계에서 고대 영산강 유역 문명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이 다시 벌어질 전망이다.

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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