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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의 울퉁불퉁 일본문화] 4. 야스쿠니 신사가 뭐기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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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 야스쿠니 신사에 일본 국회의원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 9월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초청에 응낙 의사를 전달한 뒤 곧바로 질의서가 날아왔다. 일본 어디를 방문하고 싶으냐는 것이었다. 두 가지가 떠올랐다. 노벨문학상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의 고장과 야스쿠니 신사가 그것이다. 제철이 아닌 소설의 현장은 이내 포기했고, 결국 야스쿠니를 찾는 게 내 일정의 핵심이었다. 왜 하필 야스쿠니였을까. 이웃 국가의 견제에도 일본 총리 등이 참배를 강행하는 고약한 공간이 바로 그곳 아닌가.

그러면 일본은 또 그들대로 "개인 자격이네 뭐네"라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고, 한국과 중국은 더욱 더 노발대발해 왔다. 그게 벌써 수십년째의 소동이다. "도대체 왜?"의 소박한 궁금증으로 야스쿠니를 찾은 것은 한.중.일 3개국이 지난 세기 대동아공영권의 악몽 속에 몸살을 앓아온 '지뢰밭'의 실체를 내 두 눈으로 들여다보겠다는 작심이었다. 야스쿠니를 찾은 지난 9월의 도쿄는 초가을. 나는 제안을 하나 했다. 안내차 나온 일본국제교류기금 간부에게 함께 차를 타고 우선 총리공관 앞으로 가보자고 말했다.

총리가 어떤 길로 야스쿠니까지 참배하러 가는지, 도대체 어떻게 생긴 신사에서 어떻게 참배는 진행되는지를 보게 해달라고 말했다. 확인해보니 공관에서 신사까지는 10분 거리, 우리로 치면 서울 삼청동에서 안국동 비원쯤 가는 동선이다. 막상 들어간 야스쿠니는 메이지 시대에 전쟁용사를 위령하기 위해 세워졌다. 태평양전쟁에 패한 뒤 유죄 판결을 받은 도조 히데키 같은 전범까지 받아들이는 바람에 전범 묘역으로 각인돼 왔다.

그 야스쿠니 입구에는 모든 신사가 그러하듯 우물정자 '井'을 세워놓은 듯한 거대한 로고 도리이(鳥居)가 눈에 띈다. 불교 만(卍), 기독교 십자가(+) 같은 자기네 종교의 독창적 로고인 셈일까? 거대한 도리이를 통과하면 널찍한 돌 광장 저 끝의 야스쿠니는 음습한 검은 빛깔의 옛 목조건물이다.

보통 참배객들은 경건한 표정으로 지전을 헌금함에 던지고 손바닥을 두 번 딱딱 친 뒤 합장과 함께 묵념하는 게 의식의 전부다. 분명 일본 정치인들도 그렇게 하리라. 생각해보면 희한하다. 일본인들이 허물투성이 선조(전범)를 지키는 걸 보면 처절하기까지 하다. 어쨌거나 지뢰밭 야스쿠니를 현장에서 보니 싱겁다고나 할까, 별 대단한 게 아니라는 느낌부터 들었다. 그 느낌은 내가 불행했던 파행 속의 동북아 근현대사에 무신경해서일까?

그러면서도 돌아나오는데 착잡한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네들이 나에게 되묻는 것도 같다. "우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다. 너희들은 이순신을 섬기지 않느냐. 우리는 이토 히로부미나 도조 히데키를 위한 제사를 지낸다. 너희들이 안중근, 윤봉길에게 제사를 지내는 건 우리가 상관 안 한다." 이 경우 내 쪽에서 즉각적인 답변을 내놓을 수 없다. 죽은 양국의 영혼들을 둘러싼 후손들의 신경전은 역사의 무게로 우리를 짓누른다.

어쨌거나 그들은 아스쿠니 참배를 그들 천황제와 함께 혼합 종교로 발전시켜 놓았다. 그건 21세기 보편적인 시각에서 볼 땐 분명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누구도 그 앞에서 킥킥댈 수 없다. 그들에겐 현실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문제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50여년의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로 그들이 저지른 심각한 과거사의 반칙 앞에서 우리는 답답하다. 같은 처지의 미국이 양해를 해주는 것도 아이러니다.

어쨌거나 한.일 수교 40주년를 앞둔 일본 탐방에서 나 자신은 안정을 찾았다. 이런 얘기다. 그들은 우리처럼 솔직담백하게 말할 줄 모른다. 그리하여 보아나 '겨울 연가' 같은 걸 받아들이는 한류란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의 일본식 표현으로 뒤집어 이해하면 어떨까. 대망의 2000년대 야스쿠니에 발목 잡혀 넘어질 순 없잖은가.

조영남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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