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 몸&맘] 생존장병, 실종·사망자 가족에게 지금 필요한 것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6면

“병이 이 정도로 진행될 때까지 뭘 하셨나요?”

병원 진료실이나 입원실을 찾은 지인들이 환자의 고통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하지만 힘들게 투병 중인 환자나 보호자에겐 아픈 상처를 덧나게 하는 잔인한 말이다. 때론 환자의 고통을 덜어줘야 할 진료 의사도 무심결에 이런 말을 한다.

치료가 힘들 정도로 심해진 병 때문에 가장 괴로운 사람은 단연 환자 본인이며, 그다음엔 환자 옆에서 동고동락하는 보호자다.

그들에겐 병이 위중해진 원인을 명명백백하게 가리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병세를 자꾸 물어보거나 ‘이리이리 했으면 이 지경까지는 안 됐을 텐데…’라는 식의 사후 약방문을 제시하는 일도 삼가야 한다. 또 환자의 심정을 공감한다는 명분으로 내뱉는 섣부른 위로도 고통을 가중할 위험이 있다.

진정으로 환자·보호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 묵묵히 작은 실질적 도움을 주면 된다. 예컨대 혈액이 필요한 환자에겐 한 번이라도 자신의 혈액을 수혈해 주고, 시간이 허락할 땐 보호자 대신 하룻밤을 새워준다면 환자·보호자는 큰 위로를 받을 것이다.

환자와 함께 있는 시간엔 병과 무관한 이야기, 특히 환자가 잠시라도 자신의 병을 잊은 채 웃을 수 있는 화젯거리를 들려주면 된다.

이는 비단 질병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갑작스레 불행을 겪게 된 가족·친구·친지·이웃 등 지인들을 만날 때 지켜야 할 일종의 수칙이다.

지난달 26일 저녁, 천안함 침몰이란 국가적 비극이 발생했다.

온 국민이 슬픔과 불안에 잠긴 상황이니 실종자·사망자 가족의 고통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생존 장병 역시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위험이 있는데, 특히 지금은 함께한 수많은 동료가 실종·사망한 상황이다. 실제 지난 7일, 윤한두 수도병원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생존자 중 약물이나 상담 치료를 받는 급성 스트레스 환자가 6명, 정신적 후유증 발생 가능성이 큰 고위험군은 14명, 중위험군이 17명, 저위험군이 21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의료계에선 애초부터 생존자와 실종자 가족에 대한 정신건강을 걱정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사망자실종자 가족에 대한 막무가내식 취재 경쟁이 도마에 올랐다. 급기야 실종자 가족 자녀에 대한 무리한 취재 요구를 하는 기자를 “가족을 괴롭힌다”며 지역 경찰에 신고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실종자·사망자 가족은 자신의 힘든 모습까지 보여줘야 할 공인이 아니다. 범죄자를 추궁하듯 “지금 심경이 어떠냐?”라는 식의 질문을 받으며 고통을 추가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정신의학적으로는 비극적 참사를 경험한 사람이 뉴스 등에 나오는 참사 장면 자체를 접하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이 조심하는 게 원칙이다. 고통의 순간을 한 번이라도 덜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겉으로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 실종자·사망자 가족과 생존 장병도 몇 주 혹은 몇 달이 지난 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릴 가능성은 상존한다.

생존자의 정신적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다면 이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시시각각 파악하기 보다는 그 누구라도 기회 닿는 대로 이들의 절규를 묵묵히 경청하고 공감해줘야 한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