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프로답지 못한 프로스포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로마의 콜로세움은 세계의 절반을 아우른 고대 제국의 영광을 상징한다. 수용 인원이 5만명에 이른다. 그토록 크게 지은 이유는 뭘까. 관중을 많이 수용하기 위해서였다.

콜로세움의 영광을 계승하는 현대 로마의 자랑은 '스타디오 올림피코'다. 1960년 로마올림픽 주경기장이었고, 현재 이탈리아 프로축구 AS로마의 홈구장이다. 수용 인원 8만5000명. 관중의 광적인 응원은 그것만으로도 볼거리다.

그런데 지난 4일 AS로마와 독일 바이엘 레버쿠젠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에는 그 열기가 없었다. 스탠드에 관중이 아예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유럽축구연맹(UEFA)이 내린 징계 때문이다. 9월 15일 디나모 키예프와의 홈경기에서 판정에 불만을 품은 AS로마의 관중이 심판에게 위험한 물건을 던졌다. 심판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경기는 중단됐다. UEFA는 AS로마의 몰수패를 선언하고, 향후 두 차례 홈경기를 관중 없이 치르도록 했다. 그래서 AS로마는 두 경기에 걸린 방송 중계권료와 경기장 광고료, 입장권 판매 수익 등을 모두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UEFA가 AS로마에 내린 징계의 목적은 단지 금전적 불이익에만 있지 않다. 프로스포츠란 경기를 진행하는 주체(클럽)와 그것을 향유하는 소비자(팬.관중)로 이뤄지며, 그 한 축이 배제되면 프로로서의 본질을 잃는다는 인식을 보여준 것이었다. 말하자면 AS로마는 한시적으로 프로 자격을 거세당하고 만 것이다.

콜로세움의 검투사들은 생명을 걸고 5만 관중 앞에서 싸웠다. 경기 주최자는 황제였지만 경기의 목적이자 콜로세움의 지배자는 시민이었다. 4일의 스타디오 올림피코는 주인이 자리를 비운 콜로세움이었다.

소비자가 지배하는 프로스포츠 메커니즘과 종사자들의 투철한 인식은 프로스포츠를 살찌우는 본질이다. 한국 스포츠 역시 이 본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우리 프로스포츠의 현실은 이런 인식과 거리가 있다.

세 번이나 무승부가 나온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를 보자. 소비자의 권리는 무시됐다. 야구가 본디 시간종목이 아닌데 여기에 제한을 두어 경기장의 불을 껐다. 식당 주인이 "영업시간 끝났다"며 식사 중인 손님을 내몬 것과 다름없다.

올해 프로축구는 대표팀 소집 등으로 네 번이나 리그가 중단됐다. 토.일요일에 리그 경기를, 주중에 국가대표팀 경기나 컵대회를 여는 것이 세계적인 관례지만 우리는 오히려 주중에 리그 경기가 열린 적도 적지 않다. 종잡을 수 없게 일정을 짜놓고 "팬들이 대표팀 경기만 본다"고 불평한다.

남자 프로농구의 경기시간은 평일 오후 7시, 금.토.일요일 오후 3시다. 서울시민이 평일 오후 6시에 '칼퇴근'을 해도 잠실에 제시간에 도착해 표를 사기는 쉽지 않다. 금요일 오후 3시에 경기장을 찾을 수 있는 농구팬이 몇이나 될까. 여자 프로농구는 평일에도 오후 2시에 시작한다. 관중 동원은 아예 포기하고 '중계 횟수라도 늘리기 위해' 스케줄을 짰다. 이쯤 되면 프로라고 부르기도 꺼림칙하다.

흔히 프로스포츠의 위기를 말한다. 하지만 그 위기는 팬들이 만든 게 아니다. 관중을 부를 시스템이나 아이디어 없이 빈 관중석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다. "음식은 맛있는데 손님이 안 온다"고 불평하는 상인들처럼. 소비자는 정직하다. 경기장 가는 길이 멀고 불편하고, 어쩌다 찾아가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억지로 길을 나서지 않는다.

허진석 스포츠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