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을 제대로 배워야 먹을 쓸 수 있지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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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호 10면

“3000년 동안 쓰인 미술 재료가 먹입니다. 그만한 재료가 없기에 여전히 그만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죠.”
한국화가 문봉선(49·홍익대 교수)에게 먹은 정신이요, 역사다. 먹물을 사서 그림을 그리는 요즘, 그는 묵묵히 벼루에 먹을 간다. 사향이 들어있어 향기가 그윽하기 이를 데 없다는 일제 고매원 먹이면 더욱 좋겠지만, 아니라도 상관없다.중학교 2학년 때 미술 선생님이던 아버님이 일본에서 사온 사군자 책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동양화다. 고등학교 때는 어렵게 구한 청나라 시대의 동양화 교본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을 교본 삼아 보고 또 보며 몸으로 체득했다.

한국화가 문봉선 교수, 먹의 매력을 말하다

대학(홍익대)에 입학해서는 목탄 데생과 조소와 유화를 열심히 했다. 내심 서양화를 전공할 생각이었는데, 스승이 그를 동양화의 길로 잡아끌었다. “전통의 깊은 숲을 한번 빠져나와 봐라”는 스승의 말에 “10년 만 공부해 보자”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산을 찾았고 강을 찾았다. 진경산수의 맥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그 과정이 “장편소설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동양화를 그린다고 먹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색을 배우지 않으면 먹을 쓸 수 없습니다. 전 대학 때 채색 작업도 참 많이 했는데, 그런 경험이 제가 먹을 다루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전남 담양의 소쇄원을 찾은 느낌을 먹으로 그려낸 ‘무(霧)-소쇄원’에서 장쾌한 대숲의 진한 초록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연유가 있기 때문일까.

그가 이번 금호미술관 전시에서 선보인 길이 36m짜리 대작 ‘대지(임진강)’는 또 어떤가. 2층 전시장의 사면을 빙 둘러 전시된 이 작품은 먹물을 거의 묻히지 않는 갈필(渴筆)기법으로 그려냈다. 한지에 살짝 묻은 먹 자국은 청둥오리 떼가 되어 홰를 치며 날아가고, 여유로운 농부들의 마음이 되어 이웃으로 마실을 가고, 심심한 강아지의 울음이 되어 허공을 맴돈다.

“2004년 임진강을 방문했다가 석양 무렵 이산가족의 산골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왠지 모를 분단의 애잔함에 ‘이걸 하나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6년 가을에 시작해 1년이 넘게 걸렸어요.”

감정을 효과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그는 붓을 직접 만들기도 한다. 부드러운 동양화 붓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까실하고 힘이 살아 있는 느낌을 위해서는 유화붓을 잘라낸다. “예부터 제일 좋은 붓이 너구리털을 쓰는 황모라 했는데 중국 너구리보다 우리 너구리 털이 더 좋다”는 게 그의 귀띔이다.

박사 과정을 밟느라 중국 난징예술대학을 4년간 오가면서 그는 “전통에 갇혀 현대로 나오지 못하는” 중국 미술계의 한계를 느꼈고 그럴수록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 나섰다. 그는 한때 전각공예에도 깊이 빠졌다. “전각을 하다 보면 집중력이 높아집니다. 그 작은 공간에 ‘세계’를 새겨야 하니까요. 전각을 하듯 종이를 매처럼 내려보다 보면 세계를 손에 쥔 듯한 느낌이 생기죠. 노안이 온 뒤로는 칼을 놓았지만.”

그는 그림 베끼기를 즐긴다. 아니, 베끼는 게 아니라 “뜯어본다”고 했다. 제대로 뜯어보는 데서 안목과 실력이 높아진다는 생각이다. 대만 국립고궁박물관이 1000년 전 그림인 곽희의 ‘조춘도’를 공개했을 때도, 몇 년 전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국내에 들어왔을 때도 그는 그림을 고스란히 자신의 화폭에 옮겼다. “단순히 베끼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뭘 배울 것인지 알고 가르치는 게 중요하죠. 지금 그런 것을 말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개자원화전』을 능가하는, 한국판 동양화 교본을 내고 싶다는 그의 꿈은 그래서 제대로 뜯어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며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다짐인지도 모른다.
※ 전시는 2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금호미술관, 문의 02-720-5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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