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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데친 제철 봄나물에 쌈장 듬뿍~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머위 겉절이. 초봄에 쌉쌀한 머위 잎은 입맛을 돋우는데 제격이다.


시장에 나가면 봄나물이 지천이다. 나물을 제대로 해먹기 시작한 것은 결혼 후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였다. 고기나 생선 같은 동물성 재료들은 재료 자체가 워낙 맛이 있다. 소금만 있으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재료들이다. 어른들이 ‘남의 살’맛이라고 했던, 동물성 단백질의 맛 때문이다. 하지만 나물은 다르다. 재료의 맛도 있지만 양념과 조리 방식에 따라 맛이 크게 달라지는 게 나물인데, 어릴 적 나물을 잘 먹지 않고 자라던 입맛으로는 나물 반찬을 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서울내기인 나는 정말 오랫동안 시장에 깔려 있는 연초록빛의 그 수많은 식물이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20년 시골에서 살고 서울에 돌아와 첫 봄을 맞으니, 가장 간절한 것은 봄나물이다. ‘지금쯤 문밖에 나가면 나물 천지인데…’ 하는 생각에 두고온 흙과 식물들이 간절히 보고 싶다. 20년 동안 봄부터 여름까지 나물이란 걸 사본 기억이 거의 없다. 밥을 안쳐 놓고 바구니를 들고 문 밖에 나서면 온갖 나물이 깔려 있었다. 머위나 참나물 등 먹을 만한 다년생 식물이 보일 때마다 캐다가 집 앞에 심어놓았는데, 올해는 그걸 못 먹다니 참으로 아까웠다.

그런데 시장에 가니 20년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이 내 눈에 보였다. 머위였다(머우, 머구라고도 한다). 아, 초봄에 머위도 시장에서 파는구나! 머위는 그저 한여름에 거대한 머윗대로만 시장에 나오는 줄 알았는데. 20년 전에도 있었으련만 그땐 뭐가 뭔지 몰라 그냥 지나쳤으리라. 지금가장 눈앞에 삼삼했던 것이 머위였는데 이렇게 시장에 만나니, 약간 과장하자면 고향 친구를 만난것처럼 반가웠다. 시장에는 물론 머위 말고도, 취나 심지어 땅두릅도 있기는 했지만 별로 사고 싶진 않았다. 중부지방에서 취나 두릅은 4~5월이 되어야만 나오는 나물이다. 그러니 지금 꽤 자란 취는 남부지방의 비닐하우스에서 석유깨나 잡아먹으면서 큰 식물일 게다. 땅두릅은 두릅과 착각하여 사는 사람이 있지만 맛의 급이 전혀 다르고 역시 제철도 아니다.

머위는 꽤 쌀쌀한 날씨에도 넓고 푸른 잎을 펼치며 자란다. 마치 한여름 호박잎이나 되는 것처럼 땅속 줄기가 가는 곳마다 쑥쑥 솟아오른다. 손으로 만져보아 뻣뻣해지기 이전의 여린 잎을 따서먹는데, 그 맛이 아주 쌉쌀하고 매력적이다. 날이 따뜻해질수록 쓴맛이 강해지니 지금 부지런히 따 먹을 때다. 한여름이 되면 이파리는 어른 머리만 해지고, 줄기는 허벅지까지 올라온다. 그때는 이파리는 버리고 줄기만 베어다 껍질을 벗겨 볶거나조려 먹는다. 그 맛도 일품이지만 초봄의 쌉쌀한 머위 잎은 봄의 입맛을 확 돌게 하니 이 맛을 포기할 수 없다. 그래서 그랬던가. 절에서 큰스님 시봉하는 행자가 봄에 머위를 밥상에 세 번 못 올리면 쫓겨나도 할 말이 없다는 말이 있단다.

머위의 여린 잎은 데쳐서 쌈장에 쌈을 싸먹는 것이 가장 맛있고 먹기도 편하다. 입맛 없을 때에 밥도둑 소리를 들을 만하다. 좀 더 뭔가를 하고 싶으면, 데친 머위 잎을 된장에 무쳐 먹어도 맛있다. 파•마늘•깨소금 등 나물에다 된장과 고추장, 약간의 설탕을 넣고 무치는데, 기호에 따라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함께 넣는다. 양념이 자신 없으면 집에 있는 쌈장에 무치면 가장 간편하다.

머위를 집어 장바구니에 담는데, 그 옆에 또 다른 나물이 눈에 띄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방풍나물이란다. 미나리 잎처럼 세 갈래로 갈라진 잎인데 고수풀이나 미나리보다는 크기가 아주 크고 질감도 꽤나 억세어 보였다. 한 번도 안 먹어본 것이기는 하지만, 에라, 봄나물이니 대강 먹을 만하겠다 싶어 장바구니에 담았다.
뜨거운 물에 데쳐보니 생각만큼 억세지는 않았다. 입에 넣고 씹어보니, 미나리나 고수(중국에서 향채라는 이름으로 많이 쓰는 것), 참나물 등의 냄새를 조금씩 섞어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 하긴이것들이 모두 비슷한 종류이니 맛도 비슷한 게당연하다.

맛을 보니 무치는 방법도 대강 짐작이 되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초고추장에 무치는 것인데, 나물을 싫어하는 사람도 쉽게 먹을 수 있는 요리법이기는 하나 어떤 재료이든 나물 맛을 획일화하는단점이 있다. 나물의 향과 맛을 잘 살리는 것은 조선간장과 참기름 등을 넣어 깔끔하게 무치는 것인데, 이것은 초보들이 맛을 잘 내기가 쉽지 않다. 간장의 깔끔한 맛을 원하지만 조선간장만으로 겁이나는 초보들이라면, 왜간장(시판되는 간장)을 섞어 쓰면 좀 맛내기가 쉬워진다.
그러나 부산 출신의 남편은 미나리 무침의 양념으로 멸치젓을 가장 좋아한다. 깔끔한 액젓도 괜찮고, 아예 걸진 육젓 국물로 무쳐도 맛있다. 그래, 오늘은 멸치젓으로 무쳐보자. 잘 데친 방풍나물에 맛있는 멸치젓을 넣고 파•마늘•고춧가루•깨소금을 넣어 무쳤다. 강한 방풍나물 향이 강한 젓갈맛과 어우러지니 이 역시 밥도둑이다.

머위와 방풍나물을 먹고 나니 봄나물의 허기가 조금 가시기는 했지만,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 사실 시장에 나오지 않는 나물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지금쯤 왕고들빼기도 연한 잎을 내밀었을게다. 밭둑에 나가면 한걸음 떼기가 무섭게 개망초 싹이 발에 밟힐 것이다. 개망초는 하도 번식력이 좋아 밭둑과 길가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천덕꾸러기 잡초인데, 대도시에 사는 아이들도 계란 꽃, 혹은 계란프라이 꽃이라고 부를 정도로 흔한 식물이다. 이것도 초봄에 밑동을 잘라 잘 다듬어 데쳐 무치면 맛있다. 개망초는 초여름에 키가 꽤 큰 후까지도 어린 순을 먹을 수 있다. 약간 독특한 냄새가 강하기도 한데, 그때에는 데친 후 물에 약간 우리면 냄새가 가신다. 초간장과 참기름으로 무치면 깔끔한 맛과 아작아작한 질감이 일품이다.

그뿐이랴. 명아주•질경이 등 온갖 잡초가 이 계절에는 다 나물이 된다. 심지어 쇠뜨기까지도 나물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시골에 살 때에는 명아주나 질경이는 하도 흔해서 잘 먹지 않았다. 맛도 그저 그랬으니, 맛있는 나물이 흔한 이 계절에 거기까지 손이 가랴. 이 초봄에는 독초만 아니면 웬만한 것들은 다 나물로 먹을 수 있다. 철학과 교수직을 내던지고 생태적 삶을 실천하는 윤구병의 책제목 ‘잡초는 없다’란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대중예술평론가. 요리 에세이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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