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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맹서 애증까지:고수석의 북·중 돋보기] ⑪ 후진타오와 김정일 Part.5

중앙일보

입력


약소국이었던 1964년 중국과 2006년 북한이 핵무기를 갖게 된 공통 이유는 지난주에 설명한대로 외부의 위협이 가장 큰 요인이었지요. 1970년대 미국이 주한 미군을 철수하려고 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핵무기를 가지려고 한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북한의 위협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황에서 박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핵무기 밖에 없었지요. 국가 지도자들은 자국의 안전을 최우선합니다. 마오쩌둥이 그렇게 했고, 김정일도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우리는 김정일이 핵무기를 포기하도록 만들어야 하지요. 참 어려운 과제입니다. 지금까지 핵무기를 만들었다가 스스로 포기한 유일한 나라는 올해 월드컵이 열리는 남아프카공화국입니다. 남아공은 인근 앙골라에 주둔한 쿠바군과 구소련의 앙골라․ 모잠비크 그리고 남아공의 저항세력인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대한 군사지원을 심각한 안보위협으로 간주하고 1979년 핵무기를 만들었지요. 하지만 이런 안보위협이 제거되자, 1993년 핵폐기를 선언하지요. 이 문제는 다음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오늘은 후진타오와 김정일의 마지막편을 정리하겠습니다.

후진타오는 2007년 10월에 열린 제17차 당대회에서 총서기에 유임되면서 2012년까지 중국을 이끌게 되었지요. 집권 1기(2002~2007년) 때는 권력을 장쩌민 전 국가주석과 나누어 가졌지요. 장쩌민은 2002년 총서기에서 퇴임한 이후 2004년 9월까지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유지하면서 권력을 여전히 쥐고 있었지요. 쩡칭홍 국가부주석이 장쩌민에게 당 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사임하라고 적극적으로 권고하지 않았다면 계속 그 자리에 머물었을 가능성도 있었지요. 후진타오는 2006년 9월 장쩌민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운명의 한판 승부를 벌였지요. 후진타오가 장쩌민을 필두로 하는 ‘상하이방’의 근거지인 상하이의 책임자이자 상하이방의 실세인 천량위(陳良宇, 1946~ ) 서기를 사회보장기금 비리 혐의로 구속시킨 일이지요. 이를 두고 장쩌민이 1995년 ‘베이징방’ 을 제거하여 권위를 세웠던 것처럼, 후진타오도 천량위를 잡아 권력을 공고히 하려고 했다는 얘기가 나돌았지요. 천량위는 결국 상하이시 서기에서 해임되고, 그 자리에는 2010년 현재 국가부주석인 시진핑(習近平, 1953~)이 부임하지요.

이런 정치 투쟁을 거쳐 후진타오는 2007년에 다시 총서기가 된 것이지요. 이번에는 장쩌민․ 쩡칭홍과의 삼분천하(三分天下)로 각 계파와 권력의 타협을 이루었지요. 후진타오는 공산주의청년단 즉 단파(團派) 세력으로 리커창(李克强) 부총리, 리위안차오(李源潮) 당 조직부장, 류옌둥(劉延東) 국무위원 등을 앞세워 성(城)을 공격하고 땅을 빼앗아 약간의 수확이 거두었지요. 장쩌민은 정치국 상무위원직을 유지한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 자칭린(賈慶林) 전국정협주석 등 상하이방으로 진지를 굳게 지켜 진두(陣頭)를 안정시켰지요. 그리고 쩡칭홍은 비록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물러났지만 시진핑 국가부주석, 왕치산(王岐山) 부총리, 위정성(兪正聲) 상하이시 서기, 보시라이(薄熙來) 충칭시 서기 등 태자당으로 마치 군대가 돌연히 일어선 것처럼 도처에서 수원(水源)을 얻었지요. 즉 세 사람이 삼족정립(三族鼎立)으로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룬 셈이지요.

후진타오의 임기는 이제 2년 정도 남았습니다. 집권 2기 가운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리에 마쳤으며, 세계 금융 위기에도 불구하고 중국 경제성장률을 8% 대로 유지시켰지요. 그런데 북한 핵문제는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채 남아 있습니다. 2003년 국가주석으로 취임하면서부터 매달린 문제였지만, 결국 북한의 핵실험을 저지시키지 못했지요. 국가주석 취임 이후 김정일과 2004년, 2005년, 2006년 세 차례 직접 만나 설득했지만 모두 허사로 끝났지요. 앞으로 2년 정도 시간이 남아있지만 돌파구를 마련하기는 여전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최근 김정일의 방중 여부를 놓고 국내외 언론들이 촉각을 세우고 있지요. 후진타오의 방미로 두 사람의 4번째 만남은 당분간 성사되기 어렵게 됐지요. 그러면 4월 말이라도 가능할까요? 저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중국이 줄 선물이 없기 때문이지요. 김정일은 선물이 없으면 중국에 갈 이유가 없습니다. 중국은 원자바오가 2009년 10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만난 자리에서 후진타오의 초청의사를 전달했고, 2010년 2월 평양을 방문한 왕자루이 대외연락부장도 다시 초청 의사를 전달했지요. 북한도 김정일의 방중을 고려했을 것입니다.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을 위해서는 중국의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중국은 원자바오 방북 때 북한의 핵실험에도 불구하고 어렵게나마 선물을 주었기 때문에 또 선물을 준비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김정일로서는 갈 이유가 없지요.

둘째, 김정일의 건강 때문이지요. 김정일의 수명을 놓고 여러 소문이 나돌지만, 커트 캠벨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말한 ‘3년 說’ 이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3년 說’은 지난해부터 흘러나왔기 때문에 올해로 환산하면 ‘2년 說’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 상황에서 장거리 여행은 김정일에게 무리이지요. 그리고 반드시 베이징행을 강행할 절박한 이유가 없기도 하지요.

셋째, 김정일의 경호 때문이지요. 이미 전세계 언론이나 정보기관이 압록강 철교를 24시간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북한 입장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요. 2004년 평안북도 용천역 폭발 사고 이후 김정일의 방중은 중국 정부와 긴밀한 공조하에 진행되는 상황인데, 관람객이 많은 상황에서 방중을 강행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되지요.

2012년은 후진타오와 김정일에게 중요한 해입니다. 후진타오는 ‘황제’ 에서 물러날 것이며, 김정일도 아들 김정은에게 많은 권력을 물려줄 것입니다. 지난 8년 동안 후진타오와 김정일은 각자의 위치에서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였고, 양국 관계를 악화시키기도 했지만 그래도 전통적 우호협력 관계만은 유지시켰지요.

다음은 ‘미래의 권력’ 시진핑과 김정일 편입니다.

☞고수석 기자는 중앙일보 사회부· 전국부를 거쳐 통일문화연구소에서 북한 관련 취재를 했다. 중앙일보 전략기획실 차장. 고려대에서 ‘북한· 중국 동맹의 변천과정과 위기의 동학’ 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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