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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대디’ 비웃던 외국 선수들 요즘은 부모와 동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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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박세리(오른쪽)는 LPGA 대회 때마다 코스에서 주요 선수를 인터뷰하는 J골프 MC로 데뷔했다. 첫 게스트로 나온 신지애는 인터뷰 도중 지갑 속에서 박세리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냈다. 신지애는 박세리를 가장 존경해 이 사진을 가지고 다닌다. [LA지사=김상진 기자]

LPGA 투어에서 아버지가 캐디를 하는 한국 선수는 이제 한 명도 없다. 딸을 따라 다니며 시끄러운 응원을 하는 등 무매너로 동반자들로부터 지적을 받기도 했던 일부 시끄러운 아버지는 이제 보이지도 않는다. 한 선수의 아버지는 “이제 그런 사람은 다른 부모들이 상대를 해 주지 않는다. 이제 미국식 에티켓이 완전히 정착됐다”고 말했다.

반면 미국 선수 중에서도 골프 대디가 생기고 있다. 미셸 위는 물론 폴라 크리머, 모건 프리셀, 수잔 페테르센 등 서양 선수들은 한국처럼 부모가 쫓아다니고 있다. 한국 선수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박세리가 LPGA 투어에 진출한 지 13년째가 됐다. 세계 최고 투어에서 뛰는 한국 선수 40여 명은 LPGA 투어의 주류 중 하나로 성장했다. 그들은 서양 선수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LPGA 투어에 새로운 퓨전 문화를 만들고 있다.

한국 선수들은 더 이상 새벽부터 초저녁까지 드라이빙 레인지나 연습 그린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지나친 훈련이 롱런에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국 선수들은 웨이트 트레이닝, 스트레칭 등을 곁들이면서 과학적인 프로그램에 따라 훈련한다. 미국 선수들은 초창기 한국 선수들을 “연습벌레”라고 불렀다. 칭찬 반 비아냥 반이었다. 그러면서도 미국 선수들도 훈련량을 대폭 늘렸다. 그래서 이제 한국 선수와 미국 선수의 훈련량은 별 차이가 없다.
 
박세리는 방송에 재미, 김인경은 기타 연습
이제 머리를 식힐 줄도 안다. 김인경은 쉬는 시간이면 기타로 비틀스의 블랙 버드를 연주한다. 골프 클럽을 잡느라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였는데 손가락 끝도 그에 못지않게 딱딱하다. 박세리는 저녁에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 다니고 방송 MC로 데뷔도 했다. LPGA 대회가 열릴 때마다 J골프의 주간 매거진 프로그램에서 유명 선수를 인터뷰한다. 방송 중계에 삽입할 코스 공략법도 녹화하고 있다. 예전에는 미국 선수들에게 눈치가 보여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3~4년 전만 해도 대회 중 주위 한국 식당에 한국 선수들이 거의 모였다. 그런데 요즘은 아니다. 이지영은 “미국에 온 지 오래되니 여러 음식에 적응해 사나흘에 한 번 정도만 한국 음식을 먹는다”고 말했다. 미국 선수들도 한국 선수들과 어울리는 일이 잦아지면서 한식과 친근하다.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는 선수 레스토랑에 한식인 갈비가 나왔는데 가장 먼저 동이 났다.

폴라 크리머(위)와 미셸 위는 한국 선수들의 영향으로 골프 대디와 함께 투어를 뛴다. [중앙포토]

캐디들 중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한두 번쯤 한국 선수와 호흡을 맞추지 않은 캐디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LPGA에서 영어 다음으로 중요한 제2 공용어가 됐다. 골프월드의 론 사이락 기자는 “미국 선수들은 지난해 영어시험이 논란이 되면서 한국 선수들에게 급격히 호의적이 됐다”고 했다. 미국 선수들은 “타이거 우즈가 태국에서 자라 영어를 못하면 뛰지 못하게 하겠느냐”며 “영어시험을 보는 것은 부당하다”고 한국 선수들보다 더 강하게 주장했다.

요즘 LPGA 투어의 한국 선수들은 과거처럼 화려하지 않다. LPGA 투어의 대회 수가 줄기도 했으나 한국 선수들이 가장 힘들어진 이유는 스폰서가 잡히지 않아서다. LPGA 투어에 ‘보나 리’라는 이름으로 등록한 이일희(22)도 그중 하나다. 그는 “한국에서 뛰면 계약할 수 있었는데 스폰서들이 미국 LPGA 투어에서 뛰겠다고 하니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서희경 우승 때 샴페인 세례 없어
한때 LPGA 투어 선수라는 타이틀은 한국에서 빛나는 아우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선수가 많아지면서 희소성은 사라졌다. 거품도 빠졌다. CJ로부터 매년 30억원을 받았던 한국 골프의 아이콘 박세리도 현재 스폰서가 없다. 미국 TV 카메라는 한국 선수를 웬만해서는 찍지 않는다. 그들이 대중에게 얼굴을 보일 기회는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한국에서라면 상금 랭킹 상위권에 들어 스폰서를 잡을 수 있는 선수들이 미국에서 뛴다는 이유로 오히려 손해를 보고 있다. LPGA 투어는 이동 거리가 길고 코스는 어려우며 경쟁하는 선수들의 기량은 훨씬 높은데 이런 상대적 불이익까지 받는 것에 LPGA의 한국 선수들은 상당히 서운해하고 있다.

KLPGA는 한국 골프를 성장시킨 이런 주역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지난해까지 LPGA의 한국 선수들은 원한다면 KLPGA 투어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올해 KLPGA는 이를 상위 30위까지로 제한해 버렸다. 상위권 선수들은 KLPGA 투어에 뛸 이유가 별로 없기 때문에 LPGA 투어 선수를 받지 않겠다는 의미다. 30위 안에 드는 한국 선수는 4월 10일 현재 9명에 불과하다. 박세리도 안 된다.

LPGA의 한국 선수들은 “KLPGA 투어 흥행을 위해 1년에 한 경기씩만이라도 의무적으로 참가해 달라고 사정한 때가 불과 2년 전인데 이럴 수 있느냐”면서 “이렇게 한다면 KLPGA 투어를 월드랭킹 산정에서 제외시키고 LPGA 투어의 한국 선수들 전원이 KLPGA 투어 참가를 보이콧하겠다”고 했다.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LPGA에서 뛰는 한국 선수들과 KLPGA는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KLPGA 소속의 서희경(하이트·24)이 KIA 클래식에서 우승했을 때 샴페인을 들고 나타난 한국 선수가 아무도 없던 것도 이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서운함만은 아니다. 미국에 있는 한국 선수들은 LPGA 투어가 위축되는 데 대한 위기감이 있다. 미국에서 대회가 인기가 있으려면 미국 선수들이 좀 더 많이 우승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가지고 있다. 대만의 청야니가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우승함으로써 LPGA 투어 시즌 첫 4개 대회 우승자는 모두 아시아 선수였다. 청야니의 우승을 기뻐한 한국 선수들은 거의 없었다.
 
배낭여행 학생 같은 이일희
물론 신지애(미래에셋·22)나 최나연(SK텔레콤·23) 같은 정상급 선수는 한국에서 뛸 때보다 훨씬 큰돈을 번다. KLPGA 투어 선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비싼 스폰서를 받는다. 그러나 한국 선수가 많아지면서 LPGA 투어의 한국 선수를 보호하던 스폰서라는 우산을 모두 쓸 수 없게 됐다.

이일희는 데뷔전인 KIA 클래식에서 67위에 그쳐 상금 3662달러를 받았다. 경비를 아끼려고 인터넷을 뒤져 가장 싼 비행기표와 싼 숙소를 잡았고 렌터카는 아예 빌리지 않았다.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선 커다란 집을 빌린 신지애의 집에서 묵었다. 이일희는 배낭여행을 하는 대학생처럼 생활하고 있다.

그동안 LPGA 투어에서 한국 선수들은 상대적으로 좋은 환경에서 운동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든든한 스폰서와 헌신적인 부모의 뒷바라지 속에서 투어를 뛰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이일희처럼 많은 한국 선수가 미국의 무명 선수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고난의 길이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한국으로 돌아가는 선수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올해가 지나면 더 많은 선수가 짐을 쌀 것으로 보인다.

KIA 클래식에서 우승한 서희경은 LPGA 투어가 장밋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안락한 일본에서 뛰려고 했다. 그러나 메이저대회인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오기가 생겼다고 한다. 긴 전장, 거친 러프, 딱딱한 그린에서 고생하면서 “진정한 맹수들이 사는 바로 이 정글에서 경쟁하고 싶은 전투심이 샘솟는다”고 말했다. 위대한 선수라면 당연히 느껴야 할 감정이다.

보나 리가 된 이일희가 원했던 것도 바로 이런 투어였다.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가장 어려운 골프장에서 경쟁하는 이 느낌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요”라고 그는 말했다.

라코스타·란초 미라지(캘리포니아)=성호준 기자 kar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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