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명치유신의 망령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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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역사 교과서 재수정 요구를 묵살하는 일본 정부의 대응을 보고 있노라면 1백33년 전에 있었던 '메이지유신' 의 망령들이 되살아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연중행사와 같은 악순환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의 니시오 간지(西尾幹二)회장은 일본은 아시아인이 아니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일본국 근대화의 사상적인 배경을 제공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만엔권 지폐의 초상)는 '탈아입구(脫亞入歐)' 를 주장하면서 중국과 조선을 야만보다 조금 나은 '반개(半開)' 로 규정한 바 있다.

이 탈아론은 패전 후에도 일본의 정계.재계.학계에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본인들의 각별한 지지를 받는 총리의 한사람인 요시다 시게루(吉田茂:1878~1967)도 '미국의 자본과 일본 기술을 결합시켜 동남아를 개발하는 것이 좋다' 는 식의 '신탈아론' 을 주장한 터다.

또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던 젊은 지사들을 길러낸 장주번(長州藩)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소위 정한론(征韓論)의 태두임을 감안한다면, 신도주의 일본의 부활을 주장하면서 자결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이후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도쿄 도지사,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로 이어지는 일련의 우익화 발언은 일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배경으로 한 '신탈아론' 이자, 헤이세이(平成)유신의 바람몰이가 분명하다.

한편 그와 같은 일본국의 몰염치에 대응하는 우리 정부의 초강력 전략도 지혜로운 것이 못된다. 그 까닭은 자명하다. 일본국의 역사 교과서 왜곡 소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또 호락호락 고쳐주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연중행사와 같은 악순환을 수없이 되풀이했으면서도 그동안 왜 잠자코 있었는지 묻고 싶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문제에 슬기롭게 대응하고 다시 그런 마찰을 없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지식인들에게 팽배해 있는 식민지사관을 불식해야 한다.

그것은 국사교육을 강화해야만 가능할 것인데도 실상은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의 국사과목을 극도로 축소했고, 심지어 사법.행정.외무고시에서도 국사과목을 배제했다.

바꿔 말하면 대한민국을 이끌어 나갈 고급관료를 뽑을 때, 역사인식은 고사하고 단 한 줄의 국사를 읽지 않아도 선발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참담한 노릇인가. 그 결과가 오늘 우리의 현실임을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또 일본상품 불매 운동을 벌이거나 '마일드 세븐' 같은 값싼 물건 등을 쌓아놓고 불태우는 것을 취재하는 기자들의 카메라는 몽땅 '캐논' 이며 '니콘' 이고, 중계에 나선 방송장비 또한 '소니' 일색이니, 무엇을 불매하고 태운다는 것인지 이만저만한 자가당착이 아니다.

***지식인 친일성향도 문제

같은 맥락으로 알게 모르게 우리 지식인들의 뇌리를 잠식하고 있는 친일성향을 방치한데도 맹성이 필요하다. 일본에서는 한국에서 온 정치인들을 "히루 한니치(낮에는 反日), 요루 신니치(밤에는 親日)" 라고 비아냥거린 지가 이미 오래다.

결국 저들에게 온갖 약점을 모두 드러내 보이고 나서 일본의 고립화 전략을 외친다 하여 저들이 우리의 요구대로 왜곡된 교과서를 고쳐줄 리 만무하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은 되살아난 '메이지유신' 의 망령들이 주도하는 '신탈아론' 의 일환이다. 여기에 슬기롭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국사교육을 다시 살리는 일과 우리 지식인들의 친일성향적인 정서를 뿌리뽑는 일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신봉승 (극작가·예술원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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