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이정보의 '사설시조 한 수(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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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간밤에 자고 간 그놈 아마도 못 잊어라

와야(瓦冶)놈의 아들인지 진흙에 뽐내듯이 사공놈의 정령(精靈)인지 사엇대로 찌르듯이 두더지 영식(令息)인지 곳곳이 뒤지듯이 평생에 처음이오 흉중에도 야릇해라

전후에 나도 무던히 겪었으되 참 맹세하지 간밤 그놈은 차마 못 잊어하노라

- 이정보(1693~1766)의 사설시조 한 수(首)

도학자로서의 온갖 거추장스런 탈을 벗어던지고 평민 대중의 적나라한 애욕에 자신을 의탁해 감정을 마음껏 유로(流露)해 본 작품.

조선 후기의 '길거리의 노래' 이기도 한 이 사설시조라는 특정한 시기의 문학 양태를 통해 신분적 질서에 억눌려 있던 조선조 민중들의 삶이 예술세계에 처음으로 전면화한다.

'와야놈' (기와장이) '사공놈' 이 노랫말에 등장한 것도 당시로서는 혁명적일 뿐 아니라 도대체 평민여성의 입을 통해 정련되지 않은 성애담(性愛談)이 거침없이 토로된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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