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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 사진작가 강영호씨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3류 건달 최민식. 환한 표정으로 밀입국 중국여성 파이란을 등에 업고 있다. 정겹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젊은 부부의 한때다.

하지만 정작 영화에는 이런 장면이 없다. 행복하기는커녕 도무지 신산(辛酸)하기만 한 두 남녀의 삶이 영화를 점철한다. 이 포스터는 그러니까 '아, 이들이 이렇게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사진 작가의 염원이다.

그러므로 영화관을 나선 이들이 이 포스터를 다시 보면, 영화와 우리 인생에 대한 이심전심의 기원이 포스터를 사이에 두고 오간다. 영화 '파이란' 의 포스터는 영화에 대한 희망사항, 혹은 우리 삶에 대한 기도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의 포스터는 또 어떤가. '꽃 같은 세상 날려버린다' 는 당당한 카피와는 반대로, 세상을 날려버리기는커녕 격투 끝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주인공들의 숨결이 가쁘다. 사진작가는 이들을 땅바닥에 누워 쳐다본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과 '다구리를 붙다가' (패싸움을 하다가)가장 먼저 쓰러진 작가의 시선이다. 포스터만 봐도 싸움판에 서 있는 듯하다. 피냄새가 난다. 하지만 인간애도 느껴지는 게 묘하다.

최근 한국 영화 포스터가 괄목할 만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선정적인 카피와 영화의 몇몇 장면으로 어수선하게 뒤범벅된 포스터 대신, 보는 이의 시선을 단박에 빨아들이는 작품 사진 중심의 포스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변화의 앞장에 사진작가 강영호(33)씨가 서 있다. 지난해 '인터뷰' 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선보이며 본격 데뷔했다. 그 후론 강씨를 빼놓고 영화 포스터를 말할 수 없다. '시월애' '단적비연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물고기 자리' '불후의 명작' '하루' '선물' '파이란' '수취인 불명' 등 그가 만든 포스터들은 떨어질 새도 없이 곳곳에 나붙었다.

그의 작품 목록에는 올 하반기 개봉 예정인 영화들도 줄을 지어 있다. 이미숙.전광렬 주연의 멜로물 '베사메무쵸' , 장동건.나카무라 토루 주연의 액션물 '2009 로스트 메모리스' , 하리수 주연의 에로물 '노랑머리 2' , 박중훈 주연의 스릴러 '세이 예스' , 안성기.이정재.이미연.정준호 주연의 미스터리 액션물 '흑수선' 등의 포스터 사진 촬영을 이미 끝냈거나 진행 중이다.

그가 만든 포스터들의 성향을 읽기는 힘들지 않다. 이렇게 읽자. '가공하지 않은 단 한 컷의 사진으로, 주인공의 캐릭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 그렇게 드러낸 캐릭터는 관객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 "내 작품은 어쩌면 4백분의 1초 셔터 스피드로 찍는 한 컷의 영화" 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강씨는 사진 공부를 정식으로 하지 않았다. 홍익대에서 불어와 산업.의상디자인을 전공했다. 디자인 공부를 통해 익힌 미(美)에 대한 감각이 사진에 도움이 되겠지만, 사진 촬영법은 순전히 제 힘으로 배웠다. 대학원 졸업 후 어머니로부터 선물받은 보급형 카메라가 도구였고, 여자 친구가 대상이었다. 재미가 직업이 된다고, 한 패션업체의 신인 공모전에 응모했다가 상을 받았다. 그게 현재의 그를 결정지었다.

"시나리오를 읽고 작업할지 말지를 결정하지요. 시나리오 이미지와 정서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

난 4일 오후 서울 망원동 한강 둔치. 부근의 화력발전소에서 뻗어나온 고압선과 철탑들이 어지럽다.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스' 포스터 사진 촬영 현장. 초여름의 태양이 뜨거운 가운데 장동건과 일본 배우 도루가 높은 구조물에 올라가 있다. 검은색 롱코트에 권총. 촬영이 시작되고 음악이 울려퍼진다. 듀란듀란의 '노터리어스' . 서기 20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실패한 뒤 조선이 완전히 일본의 일부로 전락한 상황에서 독립을 꿈꾸는 일단의 무리가 서울에서 활약한다는 설정이다. 그 이미지를 단 한 컷의 사진에 담는 강씨의 촬영 모습이 독특하다.

"배우들이 보는 내 모습에 신경을 씁니다. 액션물은 요란하게, 멜로물은 잔잔하게. 배우와 감응하는 거죠. "

그와 작업해본 대부분의 배우들은 그를 매우 마음에 들어 한다. 편하고 재미있다고 한다.

"배우들이 '저기 카메라가 지금 나를 찍고 있는 거지' 라고 인식하는 순간 사진은 끝입니다. 상황에 몰입하게 만들어야죠. 그래서 늘 음악을 틀고…. 어쩌면 저의 촬영 작업은 배우와의 퍼포먼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가장 기뻤던 일로 최민식씨의 전화를 받은 일을 꼽았다. 포스터를 받아본 최씨가 "너무 좋다. 영화가 포스터보다 잘 나와야 할텐데…" 라고 했단다. 강씨는 "그 이상의 칭찬은 없겠죠?" 라며 웃었다.

스튜디오 상상사진관의 주인인 강씨는 가요 CD 재킷 및 포스터 사진, CF 사진 작업도 한다. 약간은 바보스런 순진한 표정이 인상적인 김건모씨,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잇몸이 드러나도록 웃는 이은미씨 등이 그의 최근 작품이다.

글=최재희,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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