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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와 두 딸 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61호 10면

1970년대 초의 어느 날 저녁 문인들의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떤 문학상 시상식 후의 뒤풀이 자리였던 것 같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즈음 한 젊은 문인이 앞자리에 앉은 60대의 여류소설가 최정희에게 불쑥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일제 때 왜 친일 활동을 하셨나요?”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61>

술 탓이거나 철없는 질문일 수밖에 없었다. 임종국이 60년대 후반에 펴낸 ‘친일문학론’의 파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므로 그에 해당하는 원로 문인들 앞에서 ‘친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금기로 생각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원로 문인이 그런 질문을 받았다면 호통을 치고 자리를 떠났거나 못 들은 체 딴전을 피웠을 것이다.

하지만 최정희의 얼굴에 일순 당황하는 빛이 스쳐 지나가더니 이내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일본이 그렇게 빨리 망할 줄 알았나, 뭐.” 친일 활동을 했던 대개의 문인들이 심정적으로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에 꺼냈다가는 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듣는 문인들이 오히려 어이없어 할 정도였다. 최정희가 얼마나 순진한 사람이었던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최정희는 겉으로는 차갑고 냉정해 보이지만 실은 부드럽고 담백한 성격이라는 것이 그를 아는 문인들의 인물평이었다.

최정희의 그런 기질과 관련한 에피소드도 많다.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술자리의 분위기를 좋아해 문인들의 술자리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화투놀이를 즐겨 문단의 화투꾼들을 집으로 불러 밤을 새우는 일도 잦았다. 50년대 후반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처음 소설창작론을 강의할 때 ‘너무 가슴이 떨려’ 소주를 몇 잔 들이켜고 강단에 섰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기질들이 타고난 미모에다 그 특유의 여성다움과 어우러져 최정희는 일찍부터 문단의 모든 남성들에게 애인이요, 누님이요, 어머니로 통했다.

20대 중반부터 6·25전쟁으로 남편 김동환(1901~?)과 생이별할 때까지 20여 년에 걸친 최정희의 삶이 그 어떤 소설에 못지않게 드라마틱했던 것도 그와 같은 그의 성격이나 기질과 무관하지 않을 성싶다. 최정희는 1906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한의사의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남부럽지 않은 성장기를 보냈으나 아버지가 첩살림을 시작하면서 그의 삶도 고달파지기 시작한다. 친척집에 얹혀살면서 보통학교에 다니다가 19살 때 숙명여고보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때 너무 나이가 많아 편입이 어렵게 되자 호적 나이를 여섯 살이나 낮춰 1912년 생으로 등재한 것이 평생 그 나이로 살게 된 계기였다.

30년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유치진이 주도하던 학생연극운동에 참여해 활동하다가 영화감독 김유영과 가까운 사이가 되면서 최정희의 삶은 파란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뜻하지 않게 아이를 임신하게 되자 최정희는 지우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최정희는 홀로 귀국하지만 뒤따라온 김유영은 끈질기게 결혼을 강요했고, 아들을 출산하자 어쩔 수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난폭해서 툭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데다 가정을 전혀 보살피지 않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나려 안간힘 쓰던 최정희는 31년 동향의 시인 김동환이 운영하던 종합월간지 ‘삼천리’에 입사하게 되었다. 기자로 일하면서 곧바로 그 잡지에 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데뷔했다.

직장도 가졌고 소설도 쓰게 되었다지만 아들이 딸린 최정희의 삶은 여전히 삭막했고 궁핍을 벗어나지 못했다. 김동환은 그런 최정희를 여러모로 보살폈고 그것이 사랑으로 발전했던 것 같다. 39년 김유영이 사망하자 두 사람은 경기도 덕소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물론 김동환은 처자식을 거느린 가장이었지만 최정희는 이때부터 활력을 찾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폈다. 특히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인맥’ ‘지맥’ ‘천맥’ 등 이른바 ‘맥(脈) 시리즈’가 40년을 전후한 시기에 써진 것을 보면 최정희는 문학적으로도 김동환으로부터 적잖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이들 두 사람 사이에서 42년 말에 큰딸 김지원이, 46년 말에는 둘째 딸 김채원이 태어난다. 자매가 똑같이 70년대 중반 소설가로 데뷔하게 되니 모두 부모에게서 문학적 재능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두 집 살림이었지만 김동환은 세 모녀에게 자상한 남편이었고 아버지였다. 자매는 특히 어렸을 때 아버지와의 여러 가지 기억들을 지금까지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김동환은 6·25전쟁 발발 직후 서울을 점령한 북한 공산군들에 의해 청운동 ‘본가’에서 납치돼 북으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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