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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장인 정신’ 주제 강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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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혜원 신윤복의 이 ‘연희도’는 요즘 말로 하면 쌍쌍파티 현장 사진입니다. 혜원의 그림에는 으레 세 가지 유형의 남자가 등장하죠. 여자만 보면 껴안는 형, 매달리는 형, 구경만 하는 형.”

객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미술 슬라이드 쇼의 달인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61·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사진)이 모처럼 나선 강의는 명쾌하고 흔쾌했다. 8일 오후 7시30분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 강당. 최근 출간된 『우리 시대의 장인정신을 말하다』(북노마드 펴냄)에 지은이 중 한 명으로 참가한 유 교수는 이날 “책에서 다 말하지 못한 걸 보충하겠다”며 ‘다시, 장인(匠人) 정신을 말한다’란 제목으로 150여 명 청중 앞에 섰다. (재)아름지기가 전문가 6명을 초청해 진행했던 아카데미 ‘이 시대의 장인정신을 묻다’를 마무리하는 강연이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한때 작가 정신을 유독 강조했어요. 그런데 장인 정신과 작가 정신은 분리된 것일까요? 예술과 기술이 굳이 나뉘지 않던 시절의 명작들을 보면 최고의 마스터피스(걸작)는 역시 장인이 존중되던 시절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 교수는 동서양이 문화재로 소중히 지켜온 걸작 이미지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장인 정신을 설명했다. 백제 용봉향로부터 독일 판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연작까지, 강의는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어 거침없이 흘러갔다.

“21세기 장인 정신의 상실은 장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고 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인에 대한 예우는 결국 돈으로 나타납니다. 고급문화는 소비가 만드는 거죠. 비싸도 장인 정신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많이 사주면 그 분야가 절로 살아나고 발전합니다. 돈을 버는 데 애쓴 만큼 돈을 어떻게 행복하게 제대로 쓸까 생각해야죠. 한 예로, 백 년 뒤 문화재로 지정될 만한 집이 지금 얼마나 지어지고 있습니까.”

유 교수는 “내가 문화재청장이었을 때 제안하고 싶었던 걸 이제 털어놓는다”며 장인 정신을 살릴 수 있는 실천 방안 하나를 공개했다.

“나라에서 주는 각종 임명장과 상장에 장인이 만든 최고급 한지를 쓰면 전통 종이 제조 분야에서 일하는 장인들이 으쓱할 겁니다. 장인 정신은 프로 정신에 예술적 혼이 결합돼야 탄생합니다.”

강의가 끝난 뒤 책에 유 교수의 서명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그 자신이 이 시대에 장인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정재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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