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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논단] 부시가 유럽순방서 얻은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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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번에 유럽 순방에 나섰을 때처럼 대통령의 외유를 앞두고 별 성과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들이 난무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결과는 동맹국들이 미사일방어(MD), 환경,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를 보는 시각에 새로운 전환점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유럽으로 떠날 때 백악관 대변인이 이번 순방 과정에서 유럽의 지도자들이 천박하면서 거만한 텍사스의 장난꾸러기라는 잘못된 이미지로 부시 대통령을 떠올리는 것을 고쳐주겠다는 말을 할 정도로 유럽에서 부시에 대한 기대는 낮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유럽의 부시 대통령에 대한 이미지가 그가 독특한 자질을 활용하는 데 도움을 줬다. 아무도 그에게 전통적인 외교 스타일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곧장 핵심적인 사안으로 파고 드는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던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정치적 신념은 미국의 보수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는 외교적으로는 국가안보에 대한 확고한 의지로 나타나는데 MD와 전통적인 동맹국과의 관계 강화 등이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다.

반대로 부시 대통령이 상대한 유럽 지도자의 대부분은 중도 좌파다. 그들은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한 정책 등으로 점차 중도적 위치로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도 외교정책에서는 좌파적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좌파들의 압력을 받고 있다.

그들은 핵 균형이 깨져서는 안된다고 믿고 있으며 미국의 국방비 지출과 국방 목적을 의심하고 환경 문제를 강조한다.

유럽의 지도자들은 1970년대 베트남전 반대운동과 80년대 반핵운동을 경험하며 자란 사람들로 부시 대통령과의 정치적 신념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러한 그들에게 부시 대통령은 MD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생각을 곧바로 밝혔다. 유럽의 지도자들은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부담을 안으면서 근본적으로 반대를 하든지, 아니면 실제 적용면에서는 이견을 가질 수 있지만 원칙적으로는 동의한다는 뜻을 밝히든지 해야만 했던 것이다.

결과는 당사국들에 계획 일부분에 대한 동의는 유보하면서도 MD 실행 체제로 접어드는 것에는 동의를 얻어낸 것이었다.

유럽 지도자들에게는 미국의 MD망에 자국이 속하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밖에 선택사항이 없었다. 교토 의정서 문제도 마찬가지다.

부시 대통령은 지구 온난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함께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교토 의정서를 이행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부시 대통령이 제안한 대로 유럽과 미국이 우선 지구온난화와 국제 경제의 관계를 분명히 밝히고 지구온난화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는 연구에 착수하지 못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의 회담에서도 러시아가 MD 추진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달받음으로써 성공적인 외교를 했다.

부시와 푸틴의 회담은 다른 동맹국들이 러시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놓고 해오던 고민들을 없애버렸다. 동맹국들은 그동안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지만 이번 회담에서 더 이상 두 나라 사이에는 중재국이 필요없다는 사실을 느꼈을 것이다.

이는 푸틴 대통령이 이끄는 러시아는 더 이상 MD 등의 문제에 얽매이는 나라가 아니라 유럽과 국제사회에서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는 나라임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부시 대통령의 유럽 순방은 일단 일을 시작하고 보는 부시 대통령의 면모를 잘 보여준 성공적인 외교의 출발점이었다.

헨리 키신저(전 미 국무장관 기고)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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