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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조어 후진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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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중국공산당이 일본제국주의와 국민당을 물리치고 광대한 대륙을 장악한 뒤 1949년 새 정권을 수립할 때 나라이름을 정하는 문제가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공산주의 이념을 구현하는 인민의 국가라는 뜻을 담아야 할텐데, 한자로 된 근대적인 개념어들 대부분이 일제(日製)였기 때문이다. 별다른 대안도 없던 터라 결국 자존심을 꺾고 '중화인민공화국' 으로 정했다는 것이다.

'중화(中華)' 는 중국제지만 '인민(people)' 과 '공화국(republic)' 은 일제 단어다. 메이지유신(1868년)을 전후해 서구문물과 사상을 앞장서서 수입한 일본지식인들의 피나는 노력이 한자 종주국의 나라이름에까지 영향을 끼친 셈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한자단어 중 개화기의 일본이 만든 용어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문화.문명.사상.법률.경제.자본.계급.분배.종교.철학.이성.감성.의식.주관.객관.과학.물리.화학.분자.원자.질량.고체.시간.공간.이론.문학.미술.희극.비극.사회주의.공산주의… ….

메이지시대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같은 조어(造語)에 공헌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speech→연설(演說), debate→토론(討論), copyright→판권(版權) 등의 번역어가 후쿠자와의 작품이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민족' 도 따지고 보면 미야자키라는 일본인이 1880년대에 프랑스어 'Assemblee Nationale(프랑스 하원)' 를 '민족회의(民族會議)' 라고 번역한 데서 비롯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민족' 은 1890년대 들어 비로소 우리말에 편입됐다.

1백년 이상이 지난 지금, 적지않은 학자들은 일본이 만든 개념어를 번역과정의 고뇌와 시행착오를 생략한 채 결과물만 받아삼킨 우리 사회의 '지적(知的) 취약성' 을 새삼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society' 의 일제번역어 '사회(社會)' 를 사용하는 한국인은 단어의 원래 의미를 제대로 소화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왕에 받아들인 것이야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라도 번역어든 조어든 되도록 정확하고 아름답게 만들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정치권에서 '특권층 동맹' '극우동맹' '살민(殺民)정권' 같은 험악한 조어들을 남발하고 '사쿠라' 처럼 왜색이 물씬 풍기는 옛 정치판 용어까지 동원하는 걸 보면 우리는 아직도 '조어 후진국' 일 수밖에 없다.

노재현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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