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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2년 비록 북핵 2차 위기] 7. 첸치천 극비 방북…북·미·중 3자회담 길 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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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5월 15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뒤 악수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평화적 수단으로 북한 핵문제를 해결키로 한 이 회담을 끝내고 "엄청나게 걱정하고 긴장했는데 걱정은 내려놓고 긴장은 풀게 됐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2003년 3월 8일. 중국 베이징(北京)을 출발한 150석 규모의 여객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는 것이 서울의 정보 당국에 포착됐다. 베이징~평양 간 정기 여객편이 아니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북한에 들어갔나." 관련 부서에 비상이 걸렸다. 당시는 북.미 간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였다. 3월 2일 북한 전투기가 공해상에서 미 정찰기에 접근하면서 충돌할 뻔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이 여객기가 이날 평양을 떠나 백두산 중턱의 삼지연 공항으로 날아가는 것이 포착되면서 탑승자가 '거물일 것'이라는 윤곽은 잡혔다.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삼지연 별장 쪽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물이 누구인지는 잡히지 않았다.

같은 날 서울. 리빈(李濱) 주한 중국대사는 인천국제공항으로 나갔다. "본국으로 오라"는 훈령을 받고서였다. 그러나 공항에 도착한 리 대사는 "올 필요가 없다"는 연락을 받는다. 2001년 서울 부임 직전 평양주재 중국대사관 공사(서열 2위)를 지낸 리 대사에게 김 위원장은 각별히 대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보 소식통 A씨의 얘기. "당시 중국 요인이 첸치천(錢其琛) 부총리로 파악된 것은 얼마 후였습니다. 김 위원장은 2월 말부터 상당 기간 삼지연 별장에 머뭅니다. 미국이 괌 등지에 전략 폭격기를 배치했다는 얘기가 나온 이후였지요. 삼지연은 천혜의 요새인 데다 북.중 접경지역이라 공중 폭격이 쉽지 않은 곳입니다. 여기에는 전시지휘소 시설도 갖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여기서 만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첸 간 면담 장소가 삼지연이 아니라는 관측도 있다. 정부 관계자 B씨의 설명. "중국은 그날 김 위원장, 첸 부총리 간 면담이 있었다는 건 나중에 확인주었지만 면담 장소까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삼지연은 아닌 것 같다고 하는 중국 측 인사도 있습니다. 3월 8일께 삼지연에서 누군가를 태운 헬리콥터가 다른 쪽으로 이동했다는 얘기도 있고요. 그래서 면담 장소는 '이곳이다'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어요."

두 사람 간의 면담은 큰 의미를 갖는다. B씨의 이어지는 설명. "첸 부총리는 김 위원장에게 3자(북.미.중)회담을 제안합니다. 김 위원장은 이에 대해 '검토해보겠다'는 긍정적 시그널을 보냅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북한은 '북.미 양자회담을 통해 핵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아요. 중국의 제안은 '북핵 문제는 지역적 문제로 반드시 다자로 풀어야 한다'는 미국 입장과 북측 주장을 절충한 것이었지요. 그 후에도 여러 채널을 통한 협의가 있었지만 이 면담이 3자회담 개최의 길을 연 것으로 평가됩니다."

첸 부총리의 방북은 북핵 문제에 대한 중국의 본격 개입이자 대북 압력으로 해석된다.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시작됐다. 미국의 파죽지세 속에 3자회담 교섭은 본격화한다. 3월 27일 워싱턴. 윤영관 외교부 장관, 콜린 파월 국무장관 간 회담을 하루 앞두고 한.미 관계자들이 만나고 있었다. 정부관계자 C씨의 설명.

"우리 측은 미측에 북핵 해결을 위한 3단계 로드맵을 설명했습니다. 북한의 핵활동 동결→복원→북한 문제 포괄적 해결이 골자였지요. 설명이 끝나고 우리 측에서 '중국 고위 인사가 방북한 것을 아느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미측 인사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우리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제서야 미측은 '첸 부총리가 북한을 다녀갔다'면서 3자회담 개최 문제가 논의 중이란 얘기를 꺼냈습니다."

거의 같은 시각. 미 국무부 제임스 켈리 차관보 바로 밑의 도널드 카이저 부차관보가 서울에 도착했다. 비공개 방문이었다. 정부 관계자 D씨의 설명. "카이저는 토머스 허버드 주한 대사에게 3자회담 개최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방한한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허버드는 당시 반기문 청와대 외교보좌관(현 외교부 장관)을 찾아가 3자회담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의견을 묻습니다. 이 사안은 곧바로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고됩니다. 당시 대통령은 북핵 해결에 올인 하다시피 했죠. 결국 북핵 해결의 가닥을 잡는 것이 우리의 회담 참가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승인한 것으로 압니다.어려운 결정이었는데 실용주의적 접근을 한 것이죠."

3월 28일 워싱턴. 윤 장관은 파월 장관에게 3자회담 개최를 용인한다는 입장을 밝힌다. 본국의 훈령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이 3자회담 개최에 대한 한국의 양해를 얻으면서 회담 개최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미.중, 북.중, 북.미, 한.중 간 연쇄접촉이 이어졌다. 북.미 간 접촉은 3월 30일(뉴욕), 4월 8.10일(베이징) 이뤄졌다.

3자회담은 북한과 양자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승리로 여겨졌다. 그러나 북한은 이 회담이 양자대화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4월 16일. 외교통상부 브리핑실. 윤영관 외교장관이 3자회담 개최(4월 23~25일)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했다. 모 일간지가 이날 3자회담 개최 사실을 보도하자 교섭 과정을 공개했다. 회견에선 한국 배제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이에 대한 윤 장관의 답변 요지. "상황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대화가 우선 시작돼 문제를 푸는 단초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3자회담에서 한국의 참여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것이며, 실질적인 북핵 문제 협의는 한국의 참여 후 시작할 것이란 약속을 했습니다."

4월 19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 회담을 '조.미(북미) 회담'으로 규정하고, "중국은 장소국으로서 역할만 하고, 핵문제와 관련한 본질적인 문제들은 조.미 사이에 논의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8000대의 폐연료봉에 대한 재처리 작업까지 마지막 단계에서 성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선언했다.

정부 관계자 E씨의 분석. "북한은 대화와 핵 시위의 병행전략을 편 것이죠. 둘 다 미국의 군사적 대응을 막기 위한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이는 단기간에 끝난 이라크전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실제 북한도 4월 6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오직 물리적인 억제력, 막강한 군사적 억제력을 갖춰야만 전쟁을 막고 나라와 민족의 안전을 수호할 수 있다는 것이 이라크 전쟁의 교훈'이라고 밝힙니다. 어떤 의미에서 3자회담은 이라크전의 부산물이지요."

4월 23일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전세계의 주목을 끈 3자회담이 개막됐다. 그러나 회담은 첫날 저녁 파국으로 치달았다. 만찬 때 북측 대표인 이근 외무성 부국장이 미국 대표인 켈리 차관보를 복도로 불러내 폭탄 선언을 했다. "우리는 핵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물리적 입증을 하거나 이전할지는 당신들한테 달려있습니다."

물리적 입증은 핵무기를 보여주거나 핵실험을 하겠다는 것이고, 이전은 수출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회담은 25일까지 지속됐지만 의미가 없었다. 당시 정부 관계자 F씨의 회고.

"당시 북한은 '이전'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가 뭔지 정리가 안 돼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핵무기가 테러단체로 넘겨지는 것을 악몽으로 보고 있었는데 그런 얘기를 한 것이지요." 북한은 이 회담에서 조잡한 형태의 4단계 북핵 일괄타결안을 제시했으나, 위기지수는 다시 올라갔다.

4월 30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우리는 부득불 필요한 억제력을 갖추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같은 날 한.미 정보당국은 영변의 방사화학실험실(핵 재처리 시설)에서 재처리 징후를 포착한다. 정보 소식통 G씨의 설명.

"당시 이 실험실의 냉각탑에서 수증기가 나오는 것이 미국 위성사진에 잡혔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 실험실과 연결된 지원보일러에서 연기가 나온 적은 있었습니다. 냉각탑에서 수증기가 포착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재처리 징후인 비활성 기체 크립톤이나 고열은 포착하지 못해 재처리에 관한 최종 판단을 유보했지요."

북한의 핵 재처리 징후 포착은 5월 7일 미국 언론에 공개되면서 큰 파장을 던진다. 이 와중에 노무현 대통령은 북핵 해결을 위한 정상외교에 들어간다. 한.미 정상회담(5월 15일)은 그 시발점이었다. 그러나 공동성명 문안 조정은 엎치락뒤치락했다. 정부 관계자 H씨의 설명. "정상회담 직전에 이수혁 외교부 차관보가 미국 측과 막바지 문안 조정을 했습니다. 미국 측은 그전의 외교채널 협의에서 '모든 선택방안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All options are on the table)'는 것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군사적 대응을 시사하는 것이어서 대통령이 거부감을 갖고 있던 표현이지요. 그래서 타결을 못 봤어요. 이 차관보는 백악관.국무부.국방부 관계자를 만나 설득을 한 것으로 압니다. '그 표현이 성명에 들어가면 정상회담의 다른 성과들이 없어진다'고 말입니다."

결국 미국은 이 표현을 포기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양 정상은 한반도에서의 평화와 안정에 대한 위협이 증대될 경우에는 추가적 조치(Further Steps)의 검토가 이뤄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유의한다'는 문안이었다. 정상회담 하루 전이었다. 문안 조율에 어려움을 겪기는 한.일(6월 7일), 한.중(7월 7일)정상회담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한.중 정상회담은 6자회담 개최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오영환 기자.정용수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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