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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10대산업 키우자] 16. 한국 조선 현재와 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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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국의 조선산업은 지금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 을 구가하고 있다. 생산력 등 모든 면에서 앞으로 10년간 독주할 태세를 갖췄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러나 자만할 수만은 없는 조선산업의 '허(虛)' 가 있다. 돈남는 배는 아직도 서유럽 조선소에 밀린다는 점이다. 설계도 하나로 조선소를 시작해 세계 정상의 자리까지 오른 조선산업의 경쟁력 실태와 개선방안을 진단한다.

세계 제1의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은 올해 수주 목표액을 지난해 수주실적인 51억달러보다 18억달러나 적은 33억달러로 정했다.

불황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주문이 넘쳐 여유물량이 꽉 찼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이미 수주 물량이 1백40여척 1천만GT(총톤), 돈으로 따져 75억달러에 달해 2년반치의 일감을 확보한 만큼 무리하게 수주할 필요가 없다" 고 말했다.

그 대신 가스운반선.심해유전개발관련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위주로 선별 수주할 방침이다. 이런 사정은 대우조선.삼성중공업 등 국내 다른 조선사도 비슷하다. 환란 와중에서 휘청거렸던 대우중공업은 3년치 물량을 확보, 워크아웃 조기졸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중장비사업.상용차부문을 매각하거나 정리한 삼성중공업도 조선부문의 호조로 올해 2천억원의 이익을 내다보고 있다.

한국 조선산업은 지금 유례없는 '호시절' 을 맞고 있다. 반도체 등 다른 주력산업이 주춤거리는 사이에 조선이 홀로 순항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한국 조선이 중국 등 후발국의 맹렬한 추격을 뿌리치고 21세기 경쟁 파고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양적 발전에서 질적 발전으로 전환하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최봉 수석연구원은 "지난 40년 동안 세계 조선대국의 위치를 누렸던 일본처럼 되려면 부단히 기술개발을 하고 고부가가치 선박에 집중 투자해야 한다" 고 말했다.

◇ 순항하는 조선산업=물량면에서 보면 한국 조선산업은 세계 1위의 위치를 굳히고 있다. 1999년 일본을 제치고 신조선 수주 1위로 올라선 한국은 지난해에는 세계 주문물량의 45%를 차지하며 일본(29%)과 격차를 더욱 벌렸다.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 등 국내 3사가 수주량에서 나란히 세계 1, 2, 3위를 휩쓸었다. 총톤수로 따진 건조량에서도 지난해 모두 1백80척(1천1백50만GT) 97억달러어치를 만들어 반세기 가까이 세계 정상이었던 일본을 따돌렸다.

앞으로 일감이 얼마나 남았나를 따지는 수주잔량에서도 일본과의 격차를 더욱 벌려 수주.건조.수주잔량에서 한국 조선이 3관왕을 차지한 것이다.

큰 덩치에 못지않게 노동력.설비.제품설계.개발 능력 등 제조 경쟁력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임금은 선진국에 비해 아직 싸고, 90년대 중반에 대규모 투자를 해 현대적 설비를 갖추고 있다.

3차원 컴퓨터활용설계(CAD)를 이용해 다양한 선형을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은 인력 고령화로 고민하고 있는 일본을 오히려 앞서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강재.기자재 가격, 인건비, 환율 등 가격 경쟁력 면에서도 98년 일본을 앞지른 뒤 지금은 10% 이상 차이가 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아직 일본에 뒤지고 있지만 건조 경험이 쌓이면서 격차가 급속히 좁혀지고 있다. 철강.엔진 등 연관 산업의 뒷받침도 잘 돼 있는 편이다. 가격과 품질을 인정받으면서 일본과 거래해 왔던 세계 유수의 선사들이 한국 조선사로 거래를 바꾸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 물량만큼 값이 못따라와=돈으로 따지면 한국 조선의 위상은 달라진다. 드류리(영국의 조선 컨설팅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2000년 물량기준으로 세계 주문량의 40.9%인 1천2백70만GT를 휩쓸었지만 이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세계시장의 27%(약 1백억달러)정도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한국.일본에 밀려 경쟁력을 잃었다는 서유럽조선공업회(AWES) 회원국들의 경우 물량으로는 12%지만 금액으로는 30%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조선이 범용선의 생산능력은 뛰어나지만, 값이 비싼 특수선.여객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을 만드는 데는 아직 솜씨가 달리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 선박수주금액의 30%를 차지하는 호화유람선(크루즈)시장은 서유럽의 독주를 부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배값은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30만GT급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의 척당 가격은 7천4백만~7천6백만달러지만, 이보다 규모가 작은 3만GT급 여객선은 1억달러, 10만GT급 크루즈선은 4억달러를 넘는다.

국내 조선업체들도 최근 고부가가치 선박 위주로 사업구조를 재편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성공 여부에 대해서는 낙관론이 더 많다. 조선업계가 심해(深海)유전개발선박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부유식 원유생산저장설비(FPSO), 드릴십 등에서 일본을 앞지른 성공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드릴십 분야에서는 삼성중공업이 세계시장의 60%를 차지하고 있고, 몇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기술로는 어렵다던 LNG운반선 등도 최근 잇따라 수주하고 있다.

문제는 경제성이다. 특수 기능선은 부가가치가 높지만 시장이 넓지 않다. 크루즈선은 시장이 크지만 한국이 참여하기엔 설계.제작 경험이 부족하고 고급 기자재 공급업체가 없는 등 여건이 미흡하다. 이 때문에 현실을 고려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조선공업협회 이송득 이사는 "한국 조선의 능력으로 볼 때 당장 고부가가치 선박을 만들자면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국민경제에 대한 연관효과나 수익성 등을 면밀히 따져 10년 앞을 내다보는 장기적 이행 전략을 세워야 한다" 고 말했다.

이현상 기자

도움=최봉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 다음 호에는 고부가 조선(造船)의 세계 1인자 이탈리아 핀칸티에리사를 벤치마킹합니다. 한국.일본에 밀려 조선소를 문닫을 위기 속에서 이탈리아의 오랜 가공공예 전통 등을 조선에 접목, 크루즈선 전문업체로 거듭난 핀칸티에리의 성공비결을 이탈리아 현지 취재를 통해 분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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