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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한 '북핵 우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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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2005년이 한반도 운명의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연초의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 외교부 장관 입에서 '중대국면'이란 말이 나오고, 누구보다 평화적 해결을 강조해온 한국과 중국의 두 정상이 황급히 만나 '깊은 우려'를 표명하며 '지체 없는 회담 복귀'를 북한에 촉구한 사정이 심각성을 더한다.

북한이 핵보유 선언에 이어 이를 공인받기 위해 핵실험을 증명해 보일지는 더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나 여차하면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해 체제 생존을 보장받으려는 벼랑 끝 빅딜게임의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지금 와서 우리 외교부 장관을 '미국의 나팔수'로 비난하고, 남한이 북한 핵 억지력의 혜택을 보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북한은 계속 벼랑 끝으로 내닫는 느낌이다. 북핵 우산 주장은 통일이 되면 북한 핵은 우리 것이나 다름없다는 우리 쪽 통일지상주의자들의 주장과 맥이 통한다. 민족공조를 앞세워 북한을 감싸온 대가가 북핵 우산이라면 어이가 없다.

북핵 문제가 이 지경까지 온 데는 우리 당국의 책임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북한에 '한국은 우리 편'이라는 인식을 심어줘 문제 해결의 결단보다는 위험한 줄다리기를 부추겨온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 핵실험이 가져다줄 유일한 혜택은 북한 핵 인정을 거부해온 한국과 중국 등에 현실을 직시토록 만드는 것"이라는 워싱턴 포스트 한 칼럼의 역설이 눈길을 끈다.

북핵 문제가 봉쇄와 제재의 '플랜 B'로 옮겨가면서 불길한 시나리오들이 난무하고 있다. 미국 언론의 부풀리기 또는 네오콘(신보수주의자)의 음모 측면도 없지 않겠지만 '중국.러시아의 거부권 때문에 유엔 안보리 제재는 없다'는 식의 판단은 우리로선 너무 안일하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대비하는 것이 국가안보의 요체다.

설익은 '균형자'론이나 북.미 간 중재 역할에 연연할 때가 아니다. 북핵의 평화적 해결과 한국의 주도적 역할을 공언해온 이상 지금은 그 실질적인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북한이 핵도 보유하고 핵 포기의 대가도 챙긴다면 우리로선 악몽이다. 핵보유를 막기 위해 북한에 얼굴을 붉혀야 하고, 필요할 경우 미국의 바짓가랑이도 잡아야 한다. 북한으로부터 대접도 못 받고 남들에게는 북한과 한 묶음으로 취급당하면 우리의 운명은 또다시 열강의 각축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연성국력(소프트파워) 운운하지만 소프트파워의 실체는 국제사회에서 설득력과 외교력이다. 우리의 경우 인구와 국방력.경제력 등 오히려 하드파워가 상대적으로 강했으면 강했지 국가 이미지와 외교력 등 소프트파워는 더욱 못 미친다. 흘러가는 '한류'가 국가적 영향력일 수는 없고, 더구나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를 외면하는 정부에 국제사회가 도덕적 정당성 점수를 얼마나 후하게 줄까. 제국주의 소련과 대국주의 중국 사이에서 균형자 노릇을 하다 실패한 북한을 보라.

노무현 대통령은 주요 정상 간 회동 때 '말의 모험'을 삼가야 한다. 중국은 우리의 균형자 노릇을 내심 반길지 몰라도 행동으로 지지하기는 어렵다. 미-중, 중-일 간 대립구도의 심화.확산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심정적으로 우리 편에 설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 핵보유로 인한 동북아 핵확산은 러시아의 안보 이익상 용인할 수 없다. 관계국들을 자극하는 돌출 발언보다 차라리 전략적 모호성을 견지하며 장기적으로 4강 대립구도 속에서 외교안보 활동 공간을 넓혀나가는 것이 현명하다. 총명보다 어리석은 체하기가 더 어렵다는 중국 경구 '난득호도(難得糊塗)'의 지혜가 절실하다.

변상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