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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릇한 조청 듬뿍 찍은 쑥 전병의 맛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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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호 09면

3월 말에 눈발이 날리고 사흘이 멀다 하고 궂은 날이 반복되는 이상스러운 날씨임에도, 그래도 봄은 봄이다. 어쩌다가 햇볕이 쨍 하고 나는 날에는 도타워진 봄볕의 부피가 손으로 만져질 듯하다. 이런 날에는 아무리 아스팔트만 있는 대도시라 할지라도 봄빛이 사르르 내려앉은 잔디밭이나 화단 한구석을 보면 보송보송 쑥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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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봄에 신선한 나물을 먹게 되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환절기에 비타민 등의 섭취가 필요한데 온실재배가 일반화되기 전에는 겨우내 김장김치 외에 제대로 된 야채를 먹기 힘들었으니, 새봄에 땅에서 올라오는 것들부터 부지런히 캐어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다. 이런 나물들 중 이 계절을 놓치면 못 먹게 되는 식물들이 태반이다. 1년 중 음식 재료가 가장 맛있는 때를 골라 먹으려니 바로 이 계절에 봄나물을 먹었으리라. 나물도 제철이 있는 것이다.

초봄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먹을 수 있는 나물은 달래ㆍ냉이ㆍ쑥ㆍ돌나물 같은 것들이다. 달래와 냉이는 추위를 견디는 힘이 강해 이파리를 내놓은 채 월동을 한다. 얼음이 녹고 날이 조금 풀리면서 월동하던 지저분한 이파리들 사이로 비교적 깨끗한 새 잎이 조금 피어나는데, 이때 냉이를 먹게 되는 것이다. 이 시기가 지나면 냉이는 바로 꽃대가 올라오니, 딱 한 철만 먹을 수 있는 식물이다. 달래는 꽃이 비교적 늦게 피기는 하지만, 날이 더워지면 달래 맛이 싱거워진다. 희한하게도 달래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바로 그 시기에만 톡 쏘는 매운 향이 살아 있고, 그 뒤에는 그 맛이 점점 약해진다.

쑥도 먹는 철이 있다. 쑥은 봄과 가을, 두 계절에 새싹이 나니 그때만 나물로 먹을 수 있다. 쑥은 여름이 되면 어른 허리께까지 크게 자라, 어릴 적의 그 솜털 보송보송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는데, 그 왕성한 생명력이란 정말 징그러울 지경이다. 밭에서 쑥을 조금만 방치하면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어 버린다. 이런 쑥은 오로지 약으로만 쓸 수 있을 뿐이다. 돌나물(돋나물이라 하기도 한다) 역시 여름이 되면 노란 꽃이 피어버리니, 꽃망울이 생기는 시기부터는 더 이상 먹을 수 없다.

흔히 초봄에 봄나물 음식이란 쑥이나 냉이로 국을 끓이거나, 데쳐서 무쳐 먹거나, 혹은 달래 무침 같은 것을 해 먹으면 그만이다. 이런 것들은 봄에 한두 번은 꼭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음식이기는 하지만, 그저 한두 번으로 족하고 늘 먹게 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아이들은 질긴 냉이 무침이나 톡 쏘는 달래 무침을 입에도 대지 않으니, 아이들에게 봄나물 한번 먹이기란 참으로 힘들다.

봄나물을 다양하게 먹는 방법이 없지는 않다. 우선 돌나물은 좋은 샐러드 감이다. 흔히 샐러드를 하려면 양상추에다 온실에서 키워낸 색색의 야채들을 쓰게 된다. 하지만 꼭 그것뿐이랴. 온실 재배를 하지 않은 제철 야채를 골라 샐러드를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내가 요즘 해 먹는 방식은 돌나물을 주재료로 하는 샐러드다. 돌나물은 그저 연하고 시원하기만 한 나물로, 향도 맛도 거의 없다.

그러니 샐러드 감으로는 매우 적당하다. 여기에 양파 대신 달래를 이파리만 넣고, 향이 강한 것이 필요하면 참나물을 조금 뜯어 넣는다. 참나물 역시 제철 나물이고 마치 셀러리를 넣은 듯한 강한 향이 난다. 달착지근한 맛을 위해서는 배를 채 썰어 넣어도 좋은데, 배보다 덜 단 야콘을 채 썰어 넣으면 신선하고 참 맛있다. 소스는 취향대로 하는 것이 좋다. 나는 집에 있는 재료를 즉석에서 이용하는 방법을 쓴다. 새콤달콤한 마늘장아찌 국물에 약간의 간장을 섞어 야채에 끼얹고, 여기에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약간 뿌린다. 시판되는 오리엔탈 소스와 비슷한데, 훨씬 더 담백하다.

쑥도 한 봉지 사다가 국 한 번 끓여먹고 남은 것이 냉장고 속에서 썩어가기 십상인데, 이럴 때는 튀김을 해 보는 것도 좋다. 쑥국은 여러 번 데우면 한약 냄새 같은 것이 나서 맛이 없어지니 많이 끓일 수 없다. 그러니 쑥은 늘 사서 절반은 버리게 되고, 그 생각에 다시 사기가 꺼려진다. 이렇게 남아 냉장고 안에서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쑥은, 다듬고 씻어 그대로 튀김옷을 입혀 기름에 튀긴다. 마치 쑥갓 튀김을 하듯 튀기면 된다. 향긋한 쑥과 고소한 튀김옷이 아주 잘 어울려, 반찬으로도 좋고 간식으로도 맛있다.

쑥을 보면 떡 생각이 간절해지는 사람이 많다. 집에 쌀가루가 있으면 즉석에서 쑥버무리를 해 먹는 것은 식은 죽 먹기만큼 쉽겠지만, 떡집에 부탁해서야 살 수 있는 축축한 쌀가루를 갖추고 살기란 쉽지 않다. 이런 경우에는 찹쌀가루로 전병을 해 먹는 방법이 있다. 찹쌀가루는 수퍼마켓에서 제품화된 것을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쑥을 다듬어 데친 다음, 약간의 물을 섞어 믹서에 곱게 간다(이것이 귀찮으면 칼로 잘게 썰어도 괜찮다. 맛은 이것이 더 나은데, 단지 반죽할 때 좀 귀찮다). 걸쭉한 이 액체에, 찹쌀가루와 약간의 소금을 넣어 반죽한다.

찹쌀가루 반죽은 마치 떡 반죽이나 만두 반죽처럼 되직하게 해야 한다. 밀가루는 묽게 반죽해도 열을 가하면 익으며 굳는 것에 반해, 찹쌀은 밀가루 전병을 하듯 묽게 반죽하면 프라이팬에서 죽처럼 되어 버린다. 쑥물이 든 찹쌀 반죽을 동글납작하게 만들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지지는데, 찹쌀 반죽은 점성이 적어 반죽 상태로는 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두꺼운 반죽을 팬에 부치기 시작하면 점차 말랑해지고, 이때 뒤집으면서 눌러 얇게 만든다. 다 익은 전병은 설탕이나 물엿에 찍어 먹는데, 신선한 쑥 향이 기가 막히다. 이것 찍어 먹는데 ‘엣지 없이’ 맑은 이온 물엿을 내놓지는 않겠지? 당연히 노란 조청에 찍어 먹어야 제맛이다. 이쯤 되면 쑥국에 입도 대지 않던 아이들도 모두 달려든다.


대중예술평론가. 요리 에세이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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