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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부시외교 누명 벗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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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서양 논객들이 즐겨 쓰는 매너키이즘(manichaeism)이라는 말은 역사를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의 투쟁으로 보는 입장이다. 3세기에 교세를 떨친 페르시아 종교 마니교에서 유래된 매너키이즘은 선악의 중간쯤에 있을 법한 회색지대를 용납하지 않는다.

매너키이즘은 1950년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와 80년대 레이건 행정부의 외교 특징을 설명하는 데 사용돼 왔다. 덜레스에게 공산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는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어두움의 존재였고,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 이라고 불렀다.

덜레스와 레이건의 매너키이즘적인 외교가 격세유전(隔世遺傳)으로 부활한 것이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외교일 것이라고 생각됐다. 취임 초부터 부시와 그의 외교.안보 참모들이 쏟아낸 북한에 대한 강경발언과 중국견제의 노선은 덜레스와 레이건의 맥을 잇는 부시 외교의 실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이 균형 잡힌 세계질서를 위해 힘을 자제할 것인가, 아니면 압도적인 국력을 강화해 초강대국의 지위를 계속 누릴 것인가의 기로에서 후자의 길을 택하는 것이 부시 외교일 것이라고 예상됐다.

부시에게는 멕시코 말고는 최초의 본격적 해외여행인 지난주의 유럽방문이 주목받은 것은 거기서 부시 외교의 내용과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부시는 출발에 앞서 보수진영으로부터 유럽 정상들과의 회담의 목적은 단독주의의 입장에서 미국의 패권적인 지위를 강화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충고를 들었다.

그러나 부시는 적어도 이번 유럽 방문 중에는 매너키이즘의 외교를 단독주의 스타일로 추진하라는 보수파의 권고를 일축했다. 그는 발칸반도에 파견된 미군을 철수하라는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과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카네기 평화재단의 로버트 케이건은 부시가 발칸반도에서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맹국들과 행동을 같이 해야 한다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국제주의적인 견해를 채택했다고 해석했다. 부시는 유럽방문의 가장 큰 목적의 하나였던 미사일방어(MD)망 구상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지지를 받아내는 데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영국이 지지를 재확인했고 이탈리아.체코.헝가리.폴란드.터키가 지지의사를 밝혔다. 독일과 프랑스의 반대도 앞으로의 협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다. 바르샤바에서의 연설에서 부시는 머지않아 옛 소련연방의 공화국이었던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의 나토 가입이 실현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발트 연안 국가들의 나토 가입은 러시아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부시는 슬로베니아에서 만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정직하고 탁월한 지도자" 라고 치켜세우면서 유럽의 미래에 대한 미국의 구상에는 반드시 러시아와의 파트너십이 전제된다고 말했다.

나토의 동방확대와 미사일방어망에 대한 의견차이에도 불구하고 부시와 푸틴은 첫 정상회담에서 미국.러시아 관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시는 유럽 방문에서 취임 5개월 만에 외교의 지진아(遲進兒)라는 누명을 벗을 것 같다. 이념적으로도 유연해 보인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미국이 나토의 동방확대와 미국.러시아 관계의 개선으로 유럽전선에서 무거운 짐을 벗는다면 아시아로 눈을 돌려 중국을 견제하는 데 노력을 집중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둘째는 부시가 북한에 대해서도 결국은 파월의 온건노선을 받아들일 것인가다.

대북정책에 관한 부시의 성명과 북한의 응수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북.미 대화가 실질적인 진전을 보기 전에 미.중 관계가 악화되면 북.미 관계뿐 아니라 남북관계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이 걱정된다. 그러나 부시의 유럽방문의 메시지는 고무적이다. 그것은 대외정책에 관한 부시의 사고(思考)가 세월의 흐름을 반영해 덜레스와 레이건보다 훨씬 덜 매너키이즘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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