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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공간1번지] 23. 종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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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내가 종묘(宗廟)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65년 서울 운니동 소재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에 다니던 시절이다. 지금의 국립국악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국악사양성소에서 중학생 때는 종묘제례악 악장(樂章)을 과제곡으로 익혔고 고등학생 때는 까까머리에 복두를 쓰고 일무(佾舞)를 추면서 종묘대제에 참가했다.

당시 중학교 과정에서는 각자의 전공악기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소금.단소 등을 필수악기로 배워야 했다. 국악 전반에 대한 폭넓은 식견과 능력을 키우기 위한 기초과정이었다. 작고하신 김기수 선생님이 소금(小琴)과 악장을, 봉해룡 선생님이 일무를 가르치셨다.

64명의 일무 단원 중 한명으로 종묘대제에 처음 참여한 것은 고1 때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종묘가 '내 마음 속의 음악적 고향' 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생 때는 주로 종묘제례를 참관하는 입장이었던 내가 연주자로서 본격 참여하게 된 것은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들어가면서부터였다. 가야금을 전공한 나는 축.어.편종.편경과 같은 타악기를 주로 맡아야 했다. 종묘제례악 편성에는 가야금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종묘와의 인연은 그 후로도 줄곧 이어졌다. 대학교수 시절에는 해마다 5월 첫째주 일요일이 되면 어김없이 학생들을 데리고 종묘대제를 견학했으며,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장이 된 후에는 직접 일무를 지도한 학생들을 인솔해 종묘대제에 참가하기도 했다.

학생들을 일무에 참여시키기 위해서는 매년 1학기 초부터 두달 가량 방과 후에 따로 연습을 시켜야 한다. 하지만 일부 학부모와 학생들은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방과후 연습에 불평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종묘제례는 천년간을 내려온 살아있는 역사인데, 우리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하고 설득했다. 그런 노력 때문인지 이제 종묘제례의 일무에 참가하는 것은 국립국악고등학교 학생이면 당연히 치러야 할 연례행사이자 자랑스런 전통처럼 여기게 됐다. 한 후배가 자신의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일무를 추는 것이 우상숭배라 하여 끝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던 안타까운 일도 있긴 했지만.

동창들 모임에 가면 지금도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군대 얘기도 있다. 나는 학사장교(ROTC) 출신이지만 일반 사병으로 입대한 친구들은 대부분 동작동 현충원 구내 육군본부 군악대에 소속돼 있던 국악대에 배치됐다.

그 시절, 국악고 동기동창이 뒤늦게 졸병으로 입대했다. 동창들은 이 친구를 골려주기 위해 기상천외한 기합을 생각해 냈다. 달밤에 복두 대신 알철모를 쓰고 칼이나 창이 아닌 군용 반합을 들고 일무를 추게 한 것이다. 일무는 동작이 느리고 선이 매우 완만한 춤이다. 그런 춤을 알철모에 반합을 든 모습으로 추느라 아주 애를 먹던 친구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돌이켜 보면 군 복무시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해마다 연주자나 인솔자로, 또는 단순한 참관인으로라도 종묘제례를 함께 해왔으니, 종묘는 나와 평생을 함께 한 오랜 친구와 같은 곳이다.

그래서인지 최근 종묘 주변에 쓰레기 하치장이 생기고 그 출입구인 종묘앞 광장은 취객들의 싸움과 고성이 난무하며 무질서 속에 방치돼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왕조시대가 이미 사라졌다고는 하나 조선시대 역대 제왕의 신위를 모신 주변이 소란과 쓰레기로 덮이는 것은 문화국민의 자세가 아니다.

종묘라는 공간과 종묘제례와 제례악이라는 법식.음악은 엄숙함과 고요함 속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현재 종묘제례악으로 쓰이는 '보태평(保太平)' 과 '정대업(定大業)' 은 원래 세종 때 만들어져 궁중연회에 쓰이다 세조 9년에 제례악으로 채택됐다. 이는 중국음악과는 전혀 다른 우리 고유의 음악유산이며, 우리나라만이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것이다. 게다가 중국에서는 이미 그 전통이 사라졌으니, 우리의 종묘제례악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전통 의식음악으로 그 가치가 크다.

종묘는 95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지만 제례악은 제외돼 섭섭했는데 지난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회의에서 종묘제례와 제례악이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 으로 선정됐다. 평생을 함께 해온 종묘제례와 제례악이 이처럼 세계인이 아끼는 문화유산으로 인정 받게 된 데 남다른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국내에서도 64년 종묘제례악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이후 전승과 보존에 힘을 쓰고 있고, 최근에는 무대예술 작품으로 개발돼 많은 찬사와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해 국악원 무대에서 음악을 곁들인 종묘제례를 선보인데 이어 도쿄(東京)아사히홀 공연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종묘제례악 전곡을 해외무대에서 연주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국악의 해외 나들이는 옴니버스식 프로그램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를 과감히 탈피하고 싶었다.

더 나아가서 종묘제례악을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02 월드컵 경기 기간 중에는 종묘에서 종묘제례악을 특별 공연할 계획이다. 우리의 우수한 음악적.문화적 전통을 세계인들에게 알리고 과시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지난 5월 6일에도 종묘대제에 참가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선생님을 따라서 갔던 그곳에 이제는 국악원장으로서, 당시 국악사 양성소장으로 우리를 인솔했던 성경린 선생님, 인간문화재 김천흥 선생님 등과 함께 귀빈석에서 관람했다. 영녕전 제사 후에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도시락을 함께 나누면서 숱한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지나온 시절 많은 일을 해오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으나 나는 결국 이 종묘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나의 스승님들, 동학들, 후배들, 그리고 제자들까지 모두 종묘에서 만난 인연들이 아니었던가.

이런 아련한 기억의 체취가 스승님들과 나누는 도시락 위로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구십 평생을 음악에 헌신했던 스승님들의 감회에 비할 바는 못되겠지만 종묘라는 그윽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아왔다는 것이 그래도 여태까지의 역정이 가져다 준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윤미용 <국립국악원 원장>

<약력>

1946 경기 파주 출생

65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 5기 졸업

69 서울대 국악과 졸업

72 국립국악원 장악과 악사

73 서울대 대학원 국악과 졸업

74 추계예대 교수

83 국립국악고 교장

92 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병창 및 산조 전수조교

99 국립국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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