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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한국의 은행들에 유감 많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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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아직 출구전략의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더블딥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의 최고점은 지나간 듯하다. 이제는 한국의 은행들에 대해 위기 극복과정에서 참아왔던 불만을 이야기해도 될 듯싶다.

은행은 금융산업을 대표하는 기관 중 하나다. 과거에 비해 주식 등 자본시장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지만 국민경제의 혈맥을 담당하는 금융기관으로서 은행의 중요성은 여전히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은행들이 중요성에 비해 과연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은행의 1차적인 책무는 국민이 저축으로 맡긴 돈을 잘 운영하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의 은행들은 기본적인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부실한 대기업들에 많은 돈을 대출해 주고, 그 대기업이 부도가 나면서 은행도 부실화의 길을 걸었다. 은행이 부실화되자 이번에는 또다시 국민의 세금으로 은행을 살렸다. 당시 은행에 들어간 수십조원의 공적자금은 아직도 국가부채의 일부로 남아 있다. 동남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한국의 은행들은 국제적으로 빚 독촉을 받는 신용불량자 취급을 당하게 되었다. 또 정부가 나서서 모든 한국 은행들의 외국 빚에 대해 보증을 섰다. 결국 국민의 보증으로 은행이 살아났던 것이다. 이 모든 이야기가 10여 년 전 외환위기 때의 일이다. 은행 구조조정에 투입된 돈은 아직도 국민세금으로 갚아가고 있다. 앞으로 20년 가까이 계속 빚을 갚아 나가야 한다.

외환위기 발생 10년 후 한국은 다시 글로벌 금융위기의 격랑에 휩싸이게 되었다. 외환위기 과정에서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치고 세계시장에서 사투를 벌였던 우리 기업 중에는 10여 년 만에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기업이 적지 않다. 그러나 기업과는 달리 은행들은 10년 동안 달라진 것이 거의 없어 보인다.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일 때 한국의 어느 은행도 자체 신용으로 외국에서 달러를 구해 오지 못했다. 그저 국민의 금고이자 한국경제의 마지막 보루인 외환보유액에 의존하는 신세는 10년 전 외환위기 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10여 년 전에는 대기업 대출의 부실화로 은행들이 부실화에 내몰렸다. 그 후 은행들은 기업대출은 외면한 채 아파트를 담보로 잡고 돈을 대출해 주는 개인 부동산담보대출에 주력했다. 새로운 금융기법을 도입해 경쟁력을 제고하기보다는 수백 년 전통의 부동산담보대출로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 한국의 부동산은 언제 가격하락의 폭탄을 맞게 될지 모른다.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은행이 부실화하면 또다시 국민세금으로 메워야 할지도 모른다.

한편, 은행의 이익 중에는 은행 본업보다 부수업무에서 올린 수익이 더 많다. 다른 금융회사가 운용하는 펀드를 팔아서 수수료를 챙긴다. 전통적인 은행업무와는 거리가 먼 신용카드 부문에서 많은 이익을 올리고, 그 이익의 상당 부분은 신용카드 본업이 아니라 신용카드를 이용한 고리대금업에서 나온다.

은행이 제자리걸음을 하던 10년 동안 금융소비자인 국민의 고통은 더욱 커졌다. 몇 개로 통합된 은행들은 자신들의 독과점력을 여지없이 활용해 각종 수수료를 좌지우지하고 대출금리도 자의적으로 결정하고 있다. 별다른 대안이 없는 국민은 그저 울며 겨자 먹기로 은행이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국민은 고통스럽지만 은행원들의 임금은 세계적으로 높은 연봉을 자랑하고 있다. 가용한 국제 비교자료를 보면 한국 금융기관들의 평균임금은 구매력을 감안하는 경우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내에서도 은행원은 높은 월급에 안정성을 지닌 직업으로 선망의 대상이다.

이제 한국의 은행들은 변화해야 한다. 우리은행, 외환은행의 매각과 관련해 이런저런 모습의 짝짓기에 대한 구상이 한창이다. 판단의 기준은 간단하다. 한국이 낳은 글로벌 기업처럼 한국의 은행 중에서도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은행이 나와야 한다. 한국의 은행들처럼 인사 면에서 배타적인 조직도 드물고, 이러한 배타성이 은행산업 낙후의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필요하다면 새로운 인재를 영입해 은행경영에 활력소를 불어넣어야 한다. 배경과 출신, 국적을 따지지 말고 진정으로 은행에 새 바람을 넣을 수 있는 인재가 은행경영의 전면에 나서야 한다.

한국의 은행들은 국민이 수십 년 동안이나 갚아야 할 부채를 안겼다. 우리의 은행들이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은행으로 거듭나는 일이야말로 은행들이 국민에게 지고 있는 부채를 되갚는 유일한 길이다.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