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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냄비와 가마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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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하필이면 만우절이었다. 어제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으로 통하는 언덕길을 오르면서 마침 오늘이 4월 1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장례식장은 병원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더 올라가야 한다. 지상 1층, 지하 1층의 아담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건물에는 고(故) 한주호(53) 준위 한 분만 모셔져 있었다. 11시40분쯤 입관(入棺) 절차가 끝나자 빈소에 있던 유족들이 차례로 영전에 나가 고인에게 술 한 잔씩을 올렸다. 대통령·대법원장·국무총리 이름으로 시작되는 조화들은 빈소를 가득 채우고도 남아 마당 좌우에 길게 줄지어 있었다. 한쪽에 세워진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명의의 조화가 눈에 들어왔다. 나라를 위해 애쓰다 가신 분을 애도하는 마음에는 진보·보수가 따로 없었다.

그러나 조문객을 맞이하는 한 준위의 유족들에게 이런 위로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싶었다. 마치 만우절 거짓말의 뒤끝처럼, “나 사실은 살아있었어”라는 말을 듣는 상상이라도 해보고 싶은 처절한 심정 아닐까. 따지고 보면 한 준위뿐만이 아니다. 무려 46명의 젊은 목숨이 생사도 밝혀지지 않은 채 서해 바다에 갇혀 있다. 오늘로 벌써 8일째.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해서 그렇지 침몰한 천안함의 실종자 구조작업은 점점 ‘기적’을 바라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들의 가족만 하겠느냐마는, 모든 국민도 하루하루 가슴이 저며지기는 마찬가지다.

어제 오전 8시 반 현재 한 준위 빈소를 찾은 조문객은 모두 2222명이었다. 낮 12시10분 빈소를 떠나며 확인하니 2798명으로 늘어 있었다. 해군 특수전여단(UDT) 현역·예비역들과 육군 1사단 장병 등 군인 조문객이 많았지만, 아무 관계가 없는 일반인들도 끊임없이 찾아왔다. 하나같이 “너무 가슴이 아파 집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좋은 일 하다 가신 분을 마지막으로 뵈러” 찾아왔다고 말했다. 6·25 직후 공군에서 복무했다는 77세의 노인(성남시 수정구)은 오른쪽 다리가 많이 불편한데도 시내버스를 타고 왔다. 버스에서 내려 부슬비를 맞으며 언덕길을 오르는 데 족히 30분은 걸렸을 것이다.

서해 바다의 엄청난 비극이 봄날의 한바탕 꿈이라면 좋겠지만, 현실은 냉엄하다. 국군수도병원이 자리 잡은 산자락을 내려와 서울에 돌아오니 장례식장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소음(騷音)이 난무하고 있었다. 천안함 침몰 사태에 대한 군(軍)의 대응과정에는 분명히 문제들이 있었다. 레이더의 비행물체 추적 상황을 ‘접촉’ ‘소실’ 같은 군사용어로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함도 느꼈다. ‘새떼’ 논란은 더욱 가관이다. 급기야 민주당은 어제 국방부 장관과 해군참모총장을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사태의 원인이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목부터 자르잔다. 인사청문회에서 비리 의혹이 전혀 없어 야당조차 “심심한 청문회였다”던 장관이다. 취임식 치르고 일주일 만에 침몰 사고를 만난 참모총장이다. ‘목’ 따위는 진작에 내놓고 당장의 사태 수습에 매달리고 있는 군 수뇌부를 빨리 자르고 보자는 정치적 상투(常套)에 할 말을 잃는다. 여론에 따라 좌고우면(左顧右眄), 우왕좌왕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야말로 ‘새떼’를 닮지 않았는가.

이번 사태만큼은 ‘냄비’가 아니라 ‘무쇠 가마솥’에 넣어 다루어야 한다. 생존자 구조, 진상 규명, 후속 조치나 대응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진중하게, 그러나 철저하게 진행돼야 한다. 자식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다. 나도 큰아이가 군 복무 중이고 작은 아이도 20여 일 후 입대한다. 지금은 일의 선후(先後)와 경중(輕重)이 마구 범벅돼 흘러가는 느낌이다. 우리가 무쇠 가마에서 마지막으로 꺼낼 것은 군을 넘어선, 국가 차원의 탄탄한 ‘위기관리 매뉴얼’이다. 거기에서 두고두고 교훈을 얻어야 한다. 허둥대며 큰소리 낸다고 일이 풀리는 건 아니다. 작게는 내 자식의 안전부터 크게는 나라 전체의 안전보장까지, 이번 사태에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면 비극은 언젠가 다시 되풀이된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