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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조량 부족도 이쯤 되면 천재지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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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잦은 봄비와 흐린 날씨로 농작물 피해가 늘고 있다. 31일 부산시 대저동에서 한 농부가 하우스에서 잿빛곰팡이병으로 썩은 토마토를 수거해 버리고 있다. [부산=송봉근 기자]

“한창 참외꽃이 필 때 해가 없어 수정이 전혀 안 됐어요. 30년간 참외 농사를 지었지만 올해처럼 봄장마가 든 경우는 처음입니다.”

경북 성주군 칠봉산 참외작목반 회장 정식영(55)씨는 31일에도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보며 푸념했다. 지금쯤이면 하우스 안에 1m 간격으로 15~20개의 참외가 달려 있어야 하는데 올해는 거의 열리지 않았다. 그나마 달려있는 참외도 내다팔 정도로 자라진 못했다. 1만2500㎡(3800평)의 비닐하우스에서 1억원 안팎의 참외 수확을 해온 그는 “올해는 한 푼도 건지지 못할 것 같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전국 참외 생산량의 70% 정도를 담당하는 성주에서만 수천억원의 피해가 났다”고 말했다.

농민은 구름이 원망스럽다. 하루 이틀 비를 몰고 오는 것이라면 몰라도 요즘처럼 장기간 햇빛을 가리면 거의 천재지변이다. 경제에도 부담이다. ‘햇빛 부족병’은 농산물 가격을 치솟게 하고 이는 도시 서민들의 살림에 잔뜩 주름을 지울 태세다. 이에 따라 정부는 햇빛 부족을 천재지변으로 인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31일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올해 초부터 비나 눈이 오는 날이 많아 3월 초순까지 일조시간이 평년에 비해 80%에 그쳤다. 특히 3월 초순에 햇빛이 나온 시간은 14.5시간으로 예년의 21.7%에 불과했다.

이 시기는 봄에 시장에 나오는 참외·수박·멜론 등 박과 식물의 꽃이 피는 때다. 그런데 햇빛이 없어 광합성을 못 하다 보니 양분을 만들지 못해 꽃이 피지 못한 것이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시설원예시험장 권준국 연구실장은 “양분이 부족하면 식물이 스스로 살기 위해 꽃을 피우지 않고 잎만 무성해진다”고 설명했다.

다른 작물들도 심각하다. 습기가 너무 많아 잿빛곰팡이병 등 병충해가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일의 경우 꽃눈이 나오는 시점에 기온이 떨어져 제때 꽃을 피우기 어려운 상황이다. 농식품부 농산경영과 송인달 사무관은 “특히 복숭아는 저온을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피해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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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피해 보상은 쉽지 않다. 그동안 봄장마를 경험해보지 못한 까닭에 피해보상 기준은커녕, 피해조사 절차도 없다. 농식품부는 3월 하순에야 부랴부랴 피해조사 요령을 만들어 전국 지자체에 전달했다. 또 최근 전문가 회의를 열어 일조량 부족으로 인한 피해를 풍수해나 설해에 준하는 자연재해로 규정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피해는 도시로도 확산되고 있다. 우선 채소값을 중심으로 밥상 물가가 뛰어오르고 있다. 농수산물유통공사(aT)에 따르면 31일 월동배추 상품 1㎏의 도매가는 지난해(708원)의 두 배로 뛴 1460원에 거래되고 있다. 딸기도 상품 1㎏에 7700원으로 지난해 같은 때보다 13.5%나 뛰었다. 2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7%로 안정세를 보인 반면 52개 생필품으로 구성된 생활물가 상승률은 3.4%로 훨씬 높았다.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도 밝은 표정이 아니다. 매장을 봄철 상품으로 물갈이해놨는데 날씨 탓에 매기가 잠잠하기 때문이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는 “3월이면 하늘거리는 원피스가 팔려나가야 할 텐데 트렌치 코트 찾는 손님이 많다”며 “봄 신상품으로 나온 옷들을 이달에 세일로 처분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국내 여행지들도 울상이다. 하나투어 정기윤 홍보팀장은 “경제위기로 최악의 상황이었던 지난해 3월과 올 3월의 국내 여행객 숫자에 큰 차이가 없다”며 “여행지의 식당이나 여관들은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궂은 날씨 때문에 웃는 곳도 있다. 아웃도어 제품 판매업체들이 대표적이다. K2의 한 관계자는 “비가 온다고 등산을 안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바람막이 같은 상품을 더 찾게 된다”며 “올해 매출은 전년보다 20%가량 늘었다”고 말했다.

놀이공원도 사정이 좋은 편이다. 지난해 금융위기와 신종 플루의 여파로 발길을 끊었던 손님들이 올 들어 대거 찾아오고 있다. 에버랜드의 올해 입장객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 늘었다. 기상청 기상산업과 박종식 사무관은 “일반적으로 눈·비가 오면 편의점과 홈쇼핑의 매출이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며 “집에서 음식을 많이 먹기 때문에 즉석식품의 매출도 는다”고 말했다.

글=최현철·김기환 기자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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