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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삼풍정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국어사전은 '정풍(整風)' 을 '사회의 기풍이나 작풍을 바로잡음' 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정풍의 청신한 기운이 사라진 조직은 금세 병든다. 반대로 공산독재 사회나 파시스트 국가는 정풍을 명분으로 국민대중을 몰아쳐 권력투쟁과 숙청을 일삼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조선조의 탄핵제도는 독특한 데가 있다. 어항 속에 끊임없이 산소를 공급하듯 5백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체제유지.활성화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 '제도화한 정풍운동' 이었다.

예를 들어 세조가 집권할 때 결정적인 공을 세우고 예종.성종대까지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한명회(韓明澮)는 성종대에만 대간들로부터 1백7번이나 탄핵당했다. 동시대의 임사홍(任士洪)은 1백40번, 유자광(柳子光)은 56번에 걸쳐 탄핵을 받았다.

신진사림파와 훈구파의 세력다툼이라는 배경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실제 처벌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탄핵이 거듭되면 위축되게 마련이다. 한명회는 급기야 성종 12년에 왕실에서 쓰는 천막을 자기 소유 정자(압구정)에 동원하려다 탄핵받아 파직됐다가 6개월 만에 복귀하는 수모를 겪었다. 조선의 탄핵제도는 특정 권신(權臣)의 권력남용을 막아 집권세력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기능도 한 셈이다.

정풍은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이 제창한 '삼풍정돈(三風整頓)' 의 줄임말이기도 하다. 옌안(延安)시절의 毛는 1942년 2월 1일 당학교 개교식 연설에서 "당의 작풍을 정돈하자" 며 정풍운동을 선언했다.

학풍(學風).당풍(黨風).문풍(文風)의 '3풍' 을 공산주의에 맞게 진작하자는 사상개조 운동이었다. 위에서부터 시작된 중국의 정풍운동은 60년대까지 모두 다섯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결국 문화대혁명이라는 대혼란으로 연결됐다. 이 과정에서 毛는 권력기반을 강화하는 차원을 넘어 거의 신격화되기에 이른다.

어제 서울에서 열린 민주당의원 워크숍은 어떤 방향으로 결말이 날지 관심거리다. 소장파들의 당쇄신 요구에 여권 고위관계자들은 그동안 "동기는 좋은데 방법과 절차가…" 라고 판에 박힌 말만 내놓았다. 79년 말 공화당의 정풍운동 때 김종필(金鍾泌) 당시 총재가 "충정은 이해하나 시기와 방법에 문제가 있다" 고 했던 말과 똑같다.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읽지 않고 '이불안 활개짓' 으로 넘어갔다간 처음부터 일을 벌이지 않느니만 못하게 된다.

노재현 정치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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