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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편법 타협' 으로 끝난 규제완화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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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달 재계의 출자총액제한제도 완화 건의로 촉발된 정부와 재계간 갈등이 어제 정부의 '기업 경영환경 개선 건의 조치 계획' 발표로 일단락됐다. 정부는 내년 4월부터 출자총액 규제를 부활시키는 대신 규제를 받지 않는 예외를 대폭 늘려 재계의 요구를 상당부분 수용했다.

종전부터 예외로 인정됐던 구조조정 관련 출자의 예외 인정 시한이 지난 3월 말에서 2년 더 연장됐으며, 새로 핵심사업으로 삼고자 하는 업종에 대한 투자도 예외로 인정됐고,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출자는 아예 출자총액 계산에서 빠지는 등 8개의 예외조항을 신설하거나 완화했다.

또 정부는 해외 현지법인에 대한 지급보증 제한 완화와 투자세액 공제 확대 등 금융.세제상의 제약도 상당부분 풀었다. 이에 대해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추가적인 개선을 요구하면서도 "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 이라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그동안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업의 기(氣)살리기를 주창해온 우리로선 이번 정부의 규제완화가 재계의 기를 살리는 데 일정 부분 기여할 것이란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정부와 재계가 '명분은 정부가 챙기고 실리(實利)는 재계가 얻는 식' 으로 타협한 편법적 미봉책이며, 언젠가 또다시 본질적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재연될 것으로 보여 걱정이다.

정부는 출자총액 규제를 되살린다는 명분을 얻은 대신 재계가 요구하는 예외 인정 범위는 대폭 수용했는데 그렇다면 이 규제를 굳이 내년 4월에 시행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스럽다. 정부는 문어발식 경영의 우려 때문이라고 밝혀 왔지만 이 제도가 작동하던 1998년 이전에도 재벌의 확장경영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등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상당했다.

그렇다면 예외 인정 범위가 대폭 늘어난 지금 이 제도가 정부의 당초 부활 목적을 거두기가 상당히 힘들 게 분명하고, 이처럼 실효성이 의문스런 제도를 굳이 시행할 이유가 없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정부가 지나치게 '재벌 개혁' 이란 명분에만 집착한 결과라고 본다. 더욱이 계열사 출자는 신규사업이나 기존사업의 확장을 위한 벤처 캐피털(모험자본)적 성격을 갖는 등 순기능도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출자총액 규제를 도입하지 않는 게 옳다고 본다.

이번 기회에 우리는 정부가 재벌을 적(敵)으로 보는 듯한 현재의 기업정책 철학을 근본적으로 바꾸었으면 한다. 마음껏 경영할 수 있도록 기업들에 활동의 자유를 주고, 주주.이해관계자.시장에도 '견제의 자유' 를 줘 경영의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하는 쪽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는 기업활동을 제약하고 기업가 정신을 막는 출자총액 규제나 30대그룹 지정제의 폐지를 적극 검토하고, 한편으론 회계 및 공시제도의 개선 등 기업의 부정과 비리를 쉽게 적발하는 시스템 강화와 경영활동의 책임을 강력히 물을 수 있는 집단소송제 도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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