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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 몸&맘] 부모가 책 읽으면 … 아이는 안 시켜도 공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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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교 선생님인 친구가 들려준 사연부터 소개해 본다.

10년전 쯤, 담임을 맡은 학생중에 유난히도 밝고 나이에 벅찰 정도의 지성미까지 갖춘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지금부터 학생의 이름은 A라고 하자. 친구는 이런저런 질문을 통해 A가 어릴 때부터 수많은 교양 서적을 탐독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독후감 쓰는 학원에 다녔어? 아니면 독서 지도를 받은거야? “ 친구가 A에게 물었다.

“아뇨, 우리 엄마는 ‘책 읽어라’, ‘공부해라’, ‘학원 다녀라’라는 말 전혀 안 하세요.”

“어머니 바쁜 일 하셔?”

“아뇨, 전업 주부세요.”

“그럼 평상시 뭐하고 지내셔?”

“시간 나면 항상 책 보세요. 특히 문학과 철학에 관한 책을 좋아해요. 제가 ‘무슨 책 봤다’고 말하면 엄마는 책 읽고 느낀 소감이나 생각을 엄마와 교환하는 걸 반기세요.” A의 몸에서 배어나는 지성미는 어릴 때부터 늘 같이 지냈던 어머니로부터 자연스레 보고 배운 결과였던 것이다.

A와 대화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친구는 A의 어머니가 만나고 싶었는데 다행히 그 해 여름이 가기전, 우아하고 교양미 넘치는 그녀와의 대면이 이루어졌다.

친구가 첫 만남에서 대뜸 “책 읽는 걸 좋아하신다면서요”란 질문을 했더니 그녀는 “딸 때문에 독서를 즐기게 됐다”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고 한다.

“아이가 어릴 때 제가 루즈를 바르면 루즈를 갖고 놀고, 앞치마를 두르면 ‘앞치마 사달라’고 떼를 쓰더라고요. 그때 퍼뜩 ‘내가 독서를 하면 아이도 날 따라서 책을 읽겠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아이의 연령에 맞는 책을 수시로 구해서 아이의 책장에 꽂아 줬어요.그리고 저는 저대로 시간 날 때마다 아이 앞에서 평상시 보고 싶었던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A를 경험한 이후, 친구는 학부모와 면담할 때마다 “아이에게 공부하라 마라 잔소리하기 전에 아이 앞에서 어머니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세요, 그러면 아이는 자연스레 는 엄마 따라 책 읽기를 좋아하게 될 겁니다”란 조언을 해왔단다. 그런데 실천하는 어머니는 드문 것 같다며 “왜 그럴까? 내 말이 못미더운 걸까?”란 의문을 품었다.

아마도 진실은 더 단순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 스스로 책을 읽으면서 공부하는 태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일은 타인(아이)에게 “공부해라”, “학원 열심히 다녀라”, “책 읽어라”고 닥달하는 것보다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적으로 자녀는 부모의 행동을 따라하면서 ‘동일시(identification)’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 과정에서 현실적 분별력을 담당하는 ‘자아(自我 )’와 본능을 견제·감독하는 초자아(超自我)가 성장하고 성격도 형성된다. 동일시는 단순한 흉내 내기(imitation)와 달리 스트레스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작동하는 정신적 방어 기능이다.

신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다가오면서 또다시 많은 가정에서 부모-자식 간에 ‘공부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학원비 대느라 집안 살림이 여간 쪼들리는 게 아닌데도 철없는 아이는 학원 대신 게임방에 갔다”며 속상해 하는 어머니들의 하소연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하지만 진심으로 내 자녀가 공부 열심히 하길 원한다면 A의 어머니처럼, 부모인 내가 아이 앞에서 마음의 양식이라는 책 읽기를 꾸준히 실천해 보자. “아이 뒤치닥거리 하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다”는 식의 변명은 학습에 대한 지루한 속내를 ‘부정(denial)’하고, 나의 문제점을 아이 탓으로 돌리는 ‘투사(projection)’ 행위의 일종일 뿐 내 아이를 책 좋아하는 아이,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로 만드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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