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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 문화재’ 입증 시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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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최근 언론에서 다룬 자료는 『통전』 『역대장감박의』 『주역전의구결』 『왕세자책례도감의궤』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다. 『통전』은 북송 때 간행된 책으로, 고려 숙종의 장서인과 세종 때 경연청에 있던 책임을 보여주는 도장이 찍혀 있다. 12세기에 고려 왕실로 수입된 책이 조선 왕실에까지 전해진 희귀한 사례인데, 일본에는 숙종의 장서인이 찍힌 도서가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세자책례도감의궤』는 1875년에 순종을 왕세자로 책봉할 때 작성한 의궤로 태백산 사고에 보관되었고,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는 1895년에 피살된 민비를 명성황후로 높여 장례를 치른 사실을 기록한 의궤로,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었던 책이다. 나머지는 중국에서 입수된 책을 조선에서 다시 인쇄한 것인데 국내에도 다수의 판본이 있다.

이 도서들은 자료의 희귀성보다는 한국에서 유출된 도서가 서릉부에 소장된 시기와 과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가령 『통전』의 ‘경연(經筵)’ 도장은 세종대에 찍은 것이므로, 이는 임진왜란 때 강제로 유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역대장감박의』와 『주역전의구결』에는 제실도서(帝室圖書) 도장이 있고, 『국장도감의궤』에는 1922년 5월에 조선총독부에서 기증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책례도감의궤』와 『국장도감의궤』의 표지에는 조선총독부와 도서료(圖書寮)의 도서번호가 함께 있는데, 이는 태백산과 오대산 사고에 있던 의궤가 규장각에 모였다가 조선총독부를 거쳐 일본으로 유출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통전』을 제외한 모든 자료는 1905년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에 일본으로 유출된 것이 확실하며, 약탈 문화재일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문화재가 외국에 있다고 이들을 모두 약탈 문화재라고 할 수는 없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구입하거나 기증받은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서릉부에 있는 한국본 도서는 한국에서 유출된 것이 맞지만, 앞서 말했듯이 이들을 환수하려면 강제로 약탈된 문화재임을 입증해야 한다. 파리에 있는 외규장각 도서는 사정이 다르다. 약탈 문화재임을 보여주는 기록을 프랑스인이 직접 남겼기 때문이다.

서릉부에 있는 한국본 도서가 약탈 문화재임을 입증하는 것은 전적으로 전문가의 몫이다. 그러나 현재는 자료에 접근하는 것부터 쉽지 않으므로, 한국 정부와 국회에서는 우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을 서야 한다. 문화재의 환수를 거론하는 것은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진 다음에야 가능하다. 약탈 문화재임을 분명히 밝히거나, 환수 대상이 되는 자료의 목록조차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반환 협상에 나설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문식 단국대 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