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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빚은 몸으로 신의 뜻을 전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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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호 02면

볼쇼이발레단의 해외 투어 오프닝은 프리마 발레리나인 스베틀라나 자하로바(31)로부터 시작된다. 지난해 여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발레페스티벌에서도 그는 프로그램 A에서 ‘백조의 호수 흑조 파드 뒤’로 오프닝을, 프로그램 B에서는 ‘돈키호테 파드 뒤’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보통 공연의 오프닝과 피날레는 절정기에 있는 최정상급 발레리나의 몫이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발레 여제 스베틀라나 자하로바

그녀는 클래식 발레 레퍼토리의 모든 주인공 역을 거의 다 섭렵했다. 그녀가 추는 ‘빈사의 백조’는 안나 파블로바 이후 세계 최고로 알려져 있다. ‘라바이야데르’의 니키아, ‘돈키호테’의 키트리, ‘지젤’의 지젤,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오딜 역이 그녀가 주로 초청받는 레퍼토리다. 볼쇼이발레단은 지난 시즌(2009년) 신작 ‘자하로바 수퍼게임’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탈리아의 신예 프란체스코 벤틀리야가 안무하고 자하로바를 비롯해 6명의 러시아 최고의 발레리노가 출연한 현대적인 작품이었다. 볼쇼이발레단의 유일한 한국인 단원 배주윤씨는 “평생 그렇게 멋진 현대 발레는 처음 보았다. 자하로바는 클래식과 컨템퍼러리를 가리지 않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천재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자하로바의 신체는 ‘신이 빚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녀의 발등 곡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신체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완벽한 테크닉과 연기력으로 그는 카멜레온처럼 변신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마농 등 문학작품이 텍스트인 경우 먼저 책을 읽고, 배역의 감정과 테크닉을 연구한다. 나에게 맞는 의상, 헤어 디자인, 메이크업, 작은 장식까지도 직접 결정한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 작품의 캐릭터가 가지는 전체의 이미지 중 50%가 외모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자하로바가 모스크바에서 지내는 시간은 많지 않다. 전 세계가 그녀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부터 요청한 인터뷰는 거의 다섯 달 만에 어렵사리 성사됐다. 약속 장소는 현재 보수공사가 한창인 볼쇼이극장. 자하로바와의 인터뷰를 영어로 통역을 해 줄 볼쇼이극장의 안나, 주에바, 안내를 맡아준 모스크바대 헬렌 할리포바 교수와 함께 극장 아트리움을 찾았다. 보라색 콤비네이션 워머(리허설 직후 보온을 위해 입는 연습복) 차림에 ‘생얼’ 차림으로 그가 나타났다. “리허설을 마치고 바로 내려오느라 제대로 차려 입지 못해 미안하다”는 그녀에게서 무대 위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왔다.

자하로바는 러시아 피겨 스케이트를 대표하는 예브게니 플루센코의 열렬한 팬이다. 밴쿠버 겨울올림픽 얘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금메달을 딴 김연아 선수의 공연을 보았는지?
“아쉽게도 여자 피겨 싱글 경기는 못 봤지만 갈라쇼는 보았어요. 아주 흥미롭고 감명 깊었습니다. 한국의 원더걸스(the wonder from Korea)인 김 선수에게 축하인사를 전합니다. 저는 러시아팀의 성적이 저조해서 화가 많이 났어요. 플루센코가 은메달에 그친 것도 실망스러웠습니다.”

-최정상의 자리를 유지한다는 것이 힘들지 않는가?
“제가 어떻게 압박감을 이겨내느냐는 질문 같은데요. 초창기 시절에는 모든 공연이 어떤 시험을 치르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누구에게도 저를 증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요. 누구와 경쟁한다는 생각도 갖지 않고, 오로지 퍼포먼스만을 생각해요. 관객들은 무대 위의 ‘퍼포먼스’를 보아야지 ‘경쟁’을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것은 스포츠가 아니거든요. 하지만 저는 볼쇼이와 저의 조국을 아주 자랑스러워합니다. 이런 감정은 마음속에 엔진이 하나 더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정상을 유지하는 것은, 오~, 신체보다는 정신적으로 훨씬 더 힘이 들어요. 어떤 때는 연습을 하기가 싫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리허설이 너무나 힘이 들어요. 하지만 저는 지금 이것을 하지 않으면 제 역량이 바로 뒷걸음질친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렇다고 휴식을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씩 짧은 휴식을 통해 긴장을 풀어주면 ‘춤의 맛’을 더 즐길 수 있죠.”

-세계 최고의 발레 스타들이 모이는 일본 도쿄월드발레페스티벌에서 프로그램의 대미를 장식하는 당신을 보았다. 그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였나?
“커다란 경험이었고, 커다란 시험이었어요. 세계적인 발레 스타들이 초청되는 페스티벌이지요. 올림픽처럼 말이에요. 갈라콘서트 후에는 전체 공연을 마친 것보다 더 힘이 들고 지쳐요. 저보다 먼저 춤을 추었던 모든 댄서가 무대 옆에서 제 춤을 지켜보거든요. 아주 가까이서 저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거죠! 그런 공연 분위기가 낯설어서 신경이 너무 쓰입니다. 제가 날카로워져요. 이런 것들은 ‘경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본인의 재능은 선천적인가?
“재능은 신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재능이 전부는 아닙니다. 나머지는 노력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재능은 천재성을 가지게 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받은 교육, 저의 성실한 노력, 그리고 신의 가호. 이것이 제가 가진 재능의 비밀입니다.”

-하루 일과는?
“아주 지루해요. 아침 10~11시쯤에 시작해요. 그리고 리허설, 그리고 또 다른 리허설. 일주일에 단 하루 월요일만 쉬어요. 하지만 간혹 월요일에도 공연이 있을 때가 있어요.”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정치에 관심이 있는가?
“앞으로 정치 분야로 진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정치는 아주아주 흥미 있고 중요한 직종입니다. 제가 문화위원회에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의 문화가 더 향상되고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하로바는 인터뷰 도중 애플파이 한 조각과 차 한 잔으로 점심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다음 리허설이 있다며 짤막한 인사만 남긴 채 5층으로 올라갔다.인터뷰가 끝난 후 안나를 따라 공사가 한창인 볼쇼이극장을 둘러보았다. 리노베이션 공사의 가장 큰 후원자는 한국 기업이다. 극장 로비와 무대에 설치된 TV 모니터도 한국 제품이었다. 볼쇼이극장은 이 복원사업을 비롯해 활발한 해외 공연과 발레단원 임금 인상, 스타 무용수에 대한 엄청난 지원 등을 통해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 푸틴 전 대통령이 시작한 ‘위기의 볼쇼이극장 구하기’ 정책이다.

현재 볼쇼이발레단은 50여 명의 주역급 솔리스트와 200여 명의 군무진을 확보하고 있다. 발레단원에 대한 대우는 러시아의 대학 교수 수준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주역급에 대한 예우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발레를 국가적 차원의 문화상품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 자문위원으로는 자하로바 외에도 기계체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스베틀라나 호르키나, 스피드스케이팅의 스베틀라나 주로바가 등이 있다.

지난번 밴쿠버 겨울올림픽 폐막식 때 차기 개최국인 러시아가 보여준 프로그램은 음악과 발레였다. 러시아가 음악과 발레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국의 장기적이고 실질적인 정책 때문만은 아니다. 정부 정책 못지않게 음악과 발레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관심과 후원이 오늘의 러시아 공연예술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 시민들에게 극장을 찾는 것은 독서나 산책처럼 일상화돼 있다. 정부 지원과 시민의 힘이 오늘날 러시아 발레를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키워낸 것이다.


세종대 무용학과를 졸업하고 뉴욕대 대학원에서 무용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심리학 박사. 현재 한국발레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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