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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76)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76. 89년 베이징 ADB 총회

천안문 사태가 일어난 1989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 총회가 열렸다. 당시 북한은 ADB 가입을 모색하고 있었다.

ADB에 가장 많은 돈을 낸 일본도 북한이 들어오기를 바랐다. 재임 중 중국 가입 문제를 매듭지은 일본 출신의 후지오카 ADB 총재는 자기 손으로 북한을 가입시키고 싶어했다. 총회 개최국이었던 중국 역시 북한의 가입에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미국의 눈치를 봤다. 중국 당국은 북한의 가입보다 성공적인 개최에 더 신경을 썼다.

한국도 반대하지 않았다. 북한은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그 해 베이징 총회에 초청받지 못했다.

미국은 지금도 세 개의 부총재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고, 미국의 동의 없이는 ADB 등 국제 금융기구에 들어갈 수 없다. 미국을 직접 상대하겠다는 북한의 전략은 그런 점에서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북한은 당시 가입 자격이 있는 아시아 나라들 중 사실상 유일한 미가입국이었다. 북한의 가입은 ADB로서도 숙원 사업이었다. 북한을 끌어들일 때 비로소 ADB의 판도가 완성된다고 할 수 있었다.

ADB 총회가 열리는 동안 밖에서는 연일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거리에 나서면 시위대와 마주치곤 했다.

중국 당국은 시위를 막을 수도 있었지만 각국에서 온 ADB 대표단을 의식해 묵인했다. 강제 진압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ADB 총회가 천안문 사태의 도화선이 됐다고 말할 수 있다.

ADB 총회에 이어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고, 같은 이유로 학생들의 시위를 막지 않은 중국 당국은 진압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유혈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96년 8월 내가 홍콩에 있을 때 북한은 조선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이름으로 그 해 9월 열리는 '나진.선봉지대 국제투자 및 기업 토론회' 에 나를 초청했다.

중국 광저우에 주재하며 ADB까지 담당하고 있던 북한 관리가 펀드 매니저로서 중국에 투자하고 있던 나에게 초청장을 보낸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 나는 참석해도 좋을지 안기부측에 의견을 구했다. "아직은 부총리 출신이 갈 때가 아니다" 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한 마디에 나는 북한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우리나라가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건없이 끌어들이는 데 우리가 앞장서야 한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실리에 맞고 국민 부담도 줄이는 길이다.

국제기구에 가입하면 의무적으로 국내 상황에 관한 통계를 발표해야 한다. 북한사회에 관한 정보가 저절로 공개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또 북한이 차관을 들여다 사업을 벌일 경우 전 과정이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된다.

차관은 사업의 진척 정도에 따라 단계적으로 제공되고, 사용이 투명하지 않으면 즉각 중단된다. 다른 목적으로의 전용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한 마디로 북한을 국제기구에 끌어들여 외자의 맛을 알고, 잃을 게 있도록 만들자는 얘기다. 북한이 국제기구의 멤버가 되면 우리와 똑같이 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북한이 국제기구에 가입하면 우리 돈을 조금만 넣어도 된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발언권은 유지하겠지만 돈은 많이 넣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여유가 없어 돈을 내놓기 어렵다. 일본은 타산이 맞을 때만 넣을 것이다. 결국 ADB.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의 돈을 끌어들이는 길밖엔 없다.

만의 하나 북한 체제가 무너져 난민이라도 밀려들면 총을 들이댈 건가?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그들이 자기 땅에서 먹고 살 길을 찾아 주는 게 비용이 훨씬 덜 든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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