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위안부 할머니의 숭고한 기부 앞에 부끄러운 우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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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꽃다운 나이 열여섯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김순악 할머니는 중국 각지의 위안소를 돌며 참담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광복 이듬해 고국에 돌아왔어도 신산한 삶이 계속됐다. 식모살이와 날품팔이로 근근이 생계를 잇다 일흔을 넘긴 2000년에야 정부·지자체에서 생활지원금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안 먹고 안 쓰며 이 돈을 고스란히 모았다. 그 이유가 25일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 1월 세상을 떠나며 남긴 유언이 실행된 것이다. 전 재산 1억826만원 중 절반은 소년소녀 가장 돕기, 나머지 절반은 위안부 역사관 건립에 써 달라는 게 할머니의 바람이었다.

일평생 우리 사회로부터 위로는커녕 상처만 가득 받고도 오히려 큰 선물을 베풀고 떠난 할머니의 숭고한 뜻 앞에 그저 숙연해질 따름이다. 또한 “눈감기 전에 일본의 사죄를 받고 싶다”던 간절한 소원을 이뤄 드리지 못한 점 죄스럽기만 하다. 할머니는 수치심을 무릅쓰고 2003년 일본 강연회, 2008년 자서전 출간 등을 통해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국내외에 알리는 데 앞장서 왔다. 일본 정부가 과거에 저지른 범죄 행위를 인정하고 공식 사과하는 것만이 피해자들의 짓밟힌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8년째 매주 수요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어 온 동료 위안부 할머니들의 소망 역시 그것뿐이다.

그러나 2007년 미국 하원의 결의안 채택, 2009년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권고 등 국제사회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모르쇠로 일관할 뿐이다. 그사이 점점 더 많은 할머니들이 삶을 마감하고 있다. 올 들어서만 3명이 별세했다.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된 234명 중 생존자는 이제 85명에 불과하다. 이들도 대부분 80~90대의 고령인 데다 노환에 시달리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일본 정부는 더 이상 발뺌만 하지 말고 해야 할 도리를 다하라. 우리 정부도 미온적 대응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 드릴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