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정권과 재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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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역대 어느 정권에서든 정부와 재벌 관계는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정권이 바뀌면 재벌은 으레 수난의 대상이었다. 3공(共)때는 총수들이 부정축재자로 몰려 구금당하고, 헌납이란 명목으로 재산을 뺏긴 적도 있었다. 전두환(全斗煥)대통령 시절에는 재계 서열 7위인 국제그룹이 공중분해되기도 했다.

*** 싸우면서도 공생의 관계

갈등은 노태우(盧泰愚)대통령 시절 특히 심했다. "지금 우리는 기업권력과 정치권력이 일대 대결을 벌이고 있다" 는 1991년 3월 노재봉(盧在鳳)총리의 관훈클럽 연설에서 당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일도 있었다.

90년 10월 새 관저 준공을 기념해 盧대통령이 정주영(鄭周永)현대.조중훈(趙重勳)한진 회장 등 재벌 총수들을 청와대 만찬에 초대했다. 술이 거나하게 돌면서 슬슬 경제정책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왔다.

"물정 모르는 학자 출신들이 정책을 주도하면서 경제가 엉망이다…" 로 시작된 비난의 화살이 슬며시 대통령쪽으로 옮아갔고, 급기야 盧대통령이 버럭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 시절은 특히 정주영 회장과 현대에 수난의 시기였다.

그러나 이런 갈등도 그 이면(裏面)을 들여다 보면 기본적으로 양측은 공생(共生)의 관계였다. 정부는 경제발전을 위한 재벌의 역할을 인정했다. 따라서 초반 '군기잡기' 가 끝나면 다시 협조관계로 되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정경유착, 그리고 검은 돈과 특혜가 오가는 밀월관계가 싹트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떤가. 이번 갈등의 근저에는 암묵적 공감대 대신 짙은 상호불신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예전과는 다르다. 현 정부는 재벌을 '외환위기의 주범' 으로 지목, 선단식.황제 경영 타파에 주안점을 두고 비서실 폐지.상호지급보증 금지 등을 강도높게 밀어붙였다. 특히 "처음으로 재벌을 개혁한 대통령이 될 것" 이란 99년 8.15 경축사는 '재벌해체론' 으로 확대됐고, 새 정부의 움직임에 대한 재벌의 의구심은 위기감으로 바뀌었다.

하긴 시작부터 관계가 편치 않았다. 97년 대선 전 DJ후보 캠프에서 전경련 회장단과의 회동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반대로 당선 직후엔 전경련쪽에서 한 실세에게 면담을 청했다가 문전박대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예전 같은 정경유착의 잡음은 덜했지만-현대 등을 제외하곤-대신 갈등은 훨씬 깊고 심각했다. 정부는 재계를 '정신 못차리는 집단이기주의' 로 다그쳤고 재계는 '탁상공론과 효과없는 규제로 발목만 잡는다' 는 불만 속에 납작 엎드린 채 지난 3년여를 보냈다. 이것이 우리 경제에 미친 영향은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게다.

세계는 경제전쟁의 시대다. 정부와 재계가 힘을 모아도 세계와 맞서기엔 역부족이다. 이런 판에 언제까지 우리끼리 갈등하며 소모적 이념논쟁에 힘을 낭비할 것인가. 재벌이 경제력 집중 등 부정적 측면도 크지만, 경제에 대한 기여도도 부인할 수 없다.

4대 그룹만 해도 국내총생산(GDP)의 10.9%를 차지한다. 싫든 좋든 우리 경제가 그만큼 이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이젠 세상도 변했다. 개방경제 아래에서 정부와 재벌이 옛날처럼 뒤에서 은근슬쩍 주고받을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재벌 오너 역시 과거처럼 멋대로 할 수도 없다. 그러면 망한다는 것을 수차 목격했다. 그렇다면 이제 재벌.정부 관계도 달라질 때가 됐다.

*** 국익우선 '룰' 만들었으면…

정부와 재계는 공동 태스크포스를 구성, 이달 말까지 출자총액한도 등에 대한 개선안을 내놓기로 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번 기회에 정부와 재계.학계가 머리를 맞대고 재벌 문제를 근본적으로 재점검, 시장원리에 맞는 새 룰을 만드는 시도를 해 보면 어떨까. 숫자 한두개 고치는 미봉책이 아니라, 갈등이란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원천적인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우선 불신부터 버리고, 논의의 초점은 경제발전과 국익에 두도록 하자. 경쟁력 없는 기업과 부도덕한 기업인은 단호하게 퇴출당하게 하고, 대신 바르고 열심히 일하는 기업.기업인은 마음껏 뛰게 한다는 원칙에 충실하면 해답은 절로 나올 게다. 그리고 이 룰을 엄격하고 일관성있게 적용하면 더 이상 괘씸죄나 갈등.밀월.핍박 등의 구시대적 단어들이 신문에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재벌사에 획을 긋는 전환점을 찾는 발상의 전환을 기대한다.

김왕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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