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영화낚시] '엑소시스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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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공포영화는 그것이 잘된 영화든 아니든, 관객을 향해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공포영화는 그 질문을 두시간 분량으로 늘여놓은 것이다. 질문은 다름 아닌 "무섭지?" 이다. 영화는 묻고 또 묻는다. "무섭지?"

관객도 나름대로 대답을 내놓는다. "하나도 안 무섭다" 일 수도 있고 "정말 무섭다" 일 수도 있다. 관객들은 "정말 무섭다" 는 대답을 하기 위해 돈을 내고 극장에 오는 것이다. 돈을 내고 극장으로 들어오는 관객들도 무섭다. 이 무서운 관객들을 무서움에 떨게 하려면 무서울 정도의 치밀한 계산과 재능이 필요하다.

공포영화는 관객을 향해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훨씬 대답하기 어렵다. "도대체 뭐가 무서워?" 라는 질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인간이 언제 어디에서 무엇으로부터 공포를 느끼는가에 대한 것이다.

호랑이가 물어간다는 얘기는 이제 공포가 아니다. 공포영화 제작자들은 "도대체 뭐가 무섭냐" 는 질문을 붙잡고 씨름한다. 이들은 악령.정신질환자.연쇄살인범.파시스트 등의 인물을 찾아내고 이들이 움직일 만한 활동무대와 상황을 고안해낸다. 관객도 나름대로 이 질문에 대답한다. "그 연쇄 살인범 눈빛 봤어? 너무 무섭지 않냐□" 혹은 "아, 이제 외계인은 안 무서워" 따위.

윌리엄 프레드킨 감독이 28년 만에 새로 편집한 '엑소시스트' 를 보고 나온 관객들도 위의 두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무섭냐는 질문에 아마 많은 관객은 고개를 저을 것이다. "생각보다 안 무서운데요. " 그럴 수밖에. 그 영화가 만들어진 1970년대의 미국으로부터 우리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공포는 공감에서 오는 것이다.

다음 질문, 그럼 도대체 뭐가 무서운 거지? 아니,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웠던 거지? 이렇게 과거의 공포를 향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영화는 단순한 공포영화에서 시대적 맥락을 반영하는 사회적 텍스트로 변모한다.

이 영화의 공포는 악령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는 끈질기게 '아버지' 의 부재를 문제 삼고 있다. 남편과 이혼한 후, 혼자 딸을 키우는 여배우의 집에 악령이 찾아든다. 남부러울 게 없는 집에서 사춘기에 접어든 딸은 아버지를 찾지만 그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다.

결국 아버지를 대신해 악령이 귀여운 딸을 찾아온다. 이 가족의 문제는 신부(Father)들이 진짜 아버지를 대신해 집에 들어옴으로써 비로소 해결된다. 이 영화는 급격한 가족해체가 진행 중이던 70년대 미국사회 중산층의 정서에 기대고 있다. 그러니 아버지의 부재가 일상화한 요즘 2000년대에 그 영화가 무서울 리 없다.

그러나 "도대체 뭐가 무서운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엑소시스트' 의 태도는 경탄스러울 정도로 진지하고 치밀하다. 좋은 영화는 대답 대신 질문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엑소시스트' 는 명성에 값한다. 무섭지는 않지만.

김영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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