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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 풍경] 삼청동 '고향보리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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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진득하지 못한 사람은 음식을 먹는 데도 조급하다. 제철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한 달이라도 서둘러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 사람이 요즘 찾는 음식은 뭘까. 바로 보리밥이다. 시원한 냉면 타령을 할지도 모르지만 그에 앞서 보리밥을 거쳐야 한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이맘때면 쌀독이 텅텅 비어 쑥 등을 캐다가 끼니를 때워야 했다. 그러다 드디어 배불리 먹는 것이 6월쯤 첫 수확한 보리로 지은 밥이다. 쌀 한 톨 섞이지 않은 거친 보리밥이 꿀맛이었다고 보릿고개를 겪어본 이들은 회고한다.

서울 삼청동 길의 맨 위쪽에 꼭꼭 숨어있는 음식점 '고향보리밥' . 현관 위에 걸린 자그마한 간판을 보면서 잠시 잊고 지낸 배고팠던 시절을 떠올렸다.

가정집을 개조해 입구가 비좁지만 실내에 들어서면 내 집처럼 편안하다. 보리밥(5천원)을 주문하면 누런 놋그릇에 비빔용 야채가 샐러드처럼 담겨 나온다. 상추.콩나물.당근.쇠고기볶음.양파.도라지.무순에 제철나물인 취나물도 풍성하다.

여기에 꽁보리밥과 노란 기장좁쌀밥(좁쌀보다 알이 큼)을 양껏 덜어 넣고 된장.고추장을 적당히 넣어 쓱쓱 비빈다. 날아갈 듯한 보리가 차진 기장좁쌀 사이를 헤집으며 다른 비빔거리와 벌겋게 변한다. 진득하지 못하게 다 비벼지기도 전에 한 술 가득 입에 담는다. 보리 몇 알은 다시 놋그릇으로 떨어진다. 입안에 들어온 보리와 기장좁쌀은 입질을 할 때마다 몇 알씩 톡톡 터지는 기분이다.

따라 나오는 사골우거지국은 찌개처럼 국물이 적다. 푹 익은 기다란 우거지에 된장의 깊은 맛이 스며있다. 싱싱한 배추 속이 반찬으로 오르는데 추자도산 멸치액젓에 찍어 먹는다.

입에 넣으면 배추의 풋풋함과 젓갈의 짜고 쌉쌀한 맛이 묘하게 어울린다. 찹쌀 풀을 끓여 담근 열무김치는 시원하며 칼칼하다. 식탁을 차지하는 물은 뜨거운 보리숭늉이다. 일품요리로 녹두전(6천원)이 있는데 식전에 서너 명이 먹을 만하다.

"1백% 국산 녹두만을 쓰는데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맛" 이라고 자랑하는 주인의 말을 믿고 주문한 게 후회되지 않는다.

유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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