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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몽골 수교 20년 인터뷰] 엘벡도르지 몽골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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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만난 사람 = 박보균 편집인

몽골은 멀고도 가깝다. 가깝고도 멀다. 외모의 비슷함, 몽고반점 얘기는 친근감을 일으킨다. 동서양을 평정한 칭기즈칸의 리더십은 역사의 호기심이다. 인천공항에서 울란바토르까지는 3시간의 길지 않은 비행 거리다. 1990년 몽골과 한국은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 무렵 몽골은 폐쇄의 사회주의를 포기했다. 몽골식 개혁(신칠렐), 개방(넬트테 보드록) 이후 한국과 급속히 가까워졌다. 하지만 아직 경제 협력 규모는 작다. 한국의 광산개발 투자와 협력 속도도 느리다. 남북한 가교 역할도 한계가 있다.

26일은 양국 수교 20주년 기념일이다. 지난 19일 엘벡도르지 몽골 대통령(47세)을 찾았다. 대통령 집무실은 수도 울란바토르의 상징인 수흐바타르 광장 옆에 있다. 그는 솔롱고스(무지개의 땅, 몽골은 한국을 이렇게 부른다)에서 온 기자들을 반갑게 맞았다(※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

-수교 20주년입니다. 지금의 양국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몽골인들은 한국인에 대해 ‘역사적 연관이 있는 형제’라고 말합니다. 20년 전 수교는 다른 환경에서 자라던 형제가 다시 만난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은 외세 침략과 분단 등을 극복한 용감하고 부지런한 국민입니다. 한국에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이 같은 인식이 양국 국민을 역사적 형제에서 미래의 형제로 발전시킬 것입니다.”

-몽골 외교에서 한국은 어떤 존재입니까.

“몽골은 러시아와 중국으로 둘러싸인 내륙국가입니다. 우리는 이 두 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를 ‘제3의 이웃’으로 규정하지요. 몽골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미국·일본 등 주요 국가와 전략적 이해관계를 조밀하게 형성한다는 뜻입니다. 한국은 ‘제3의 이웃’ 중 핵심 국가입니다.”

-북한의 핵개발은 동북아 정세의 불안요인입니다. 몽골은 남북한 양쪽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지난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만나 ‘북한의 개방 유도를 위한 역할에 나서겠다’고 하셨는데요.

박보균 본지 편집인이 지난 19일 오후 울란바토르의 정부 종합청사 내 대통령 집무실에서 엘벡도르지 대통령(오른쪽)에게 질문하고 있다. [울란바토르=오종택 기자]

“박 전 대표와 만나 북한 핵개발과 미사일 실험에 대해 분명한 우려를 표했지요. 한반도 정세를 악화시키는 어떠한 행위도 전면 중단되고, 유엔 안보리의 한반도 관련 결정이 철저히 이행되어야 한다는 게 몽골의 입장입니다. 남북한 평화 정착을 위한 회담을 몽골에서 개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몽골은 북한과 1948년에 수교했다. 전통적 우호 협력관계다. 1999년 북한은 몽골이 한국의 대북정책을 지지한 데 반발해 주몽골대사관을 폐쇄했다. 그 후 2004년 다시 개설했다. 2007년 김영남 상임위원장의 몽골 방문을 계기로 관계가 복원됐다.)

-한국은 몽골의 광산개발 등 풍부한 자원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분야 정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과거 정부부터 투자유치 진흥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습니다. 외국인 투자가 몽골 국내총생산(GDP)의 11%를 기여하고 있지요. 광산개발에 필요한 인프라 건설에 한국의 투자를 원합니다.”

(※그는 우리 기업이 투자의향서를 제출한 아반톨고이 석탄광 개발에 대해 ‘국회가 결정하고, 내각에서 추진할 일’이라고만 말했다.)

-한국은 후진국들 중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공시킨 나라입니다. 한국 경제의 어떤 점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경제자유지역 설립, 첨단기술을 바탕으로 한 수출전략, 물류시스템 등을 도입하고 싶습니다. 광물자원에만 의존한 경제구조로는 몽골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이 불가능합니다. 국내 자원가공 산업과 원유가스 분야에 대한 한국의 투자에 관심을 갖고 있지요.”

-몽골은 민주화와 경제개혁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 발전 초기에 민주화와 경제성장은 양립하기 어렵다는 게 역사적 경험입니다.

“1990년 민주화운동 초기 ‘선(先) 경제성장, 후(後)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동시에 추진키로 했지요. 민주화를 뒤로 미룬다면 언젠가 더 큰 후유증을 겪을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방,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상당한 혼란을 겪었습니다. 몽골은 평화적으로 이뤄냈는데, 어떻게 가능했는지요.

“그 시절 몽골은 옛 소련의 위성국이나 다름없었지요. 소련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주적 발전을 위해선 민주화가 필수적이었습니다. 당시 민주화운동을 했던 우리의 손에는 마이크와 대정부 제안서가 고작이었지요. 무기는 없었습니다. 법을 통해 체제를 바꾸겠다는 게 목표였지요. 정부에 무력 동원 원인을 제공하지 않은 것입니다. 특정 정당이나 인물이 아닌 모든 정당, 국민이 참여했기에 평화적 체제 전환이 가능했습니다.”

(※1990년 7월 몽골인민혁명당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고 민주·자유·인권 등을 내용으로 하는 신헌법을 채택했다. 당시 동유럽 중 루마니아는 유혈사태가 있었고, 옛 소련은 상당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워싱턴 포스트는 1995년 ‘1000년의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칭기즈칸 리더십 배우기’ 열풍이 불었는데요.

“몽골인들은 수천 년 전부터 관리의 지혜를 갖고 있던 민족입니다. 몽골인들이 칭기즈칸이라는 탁월한 지도자를 만들었습니다. 칭기즈칸은 ‘비록 내 몸이 부서지도록 고생하더라도, 내 국민은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헌신적인 지도자였지요. 국민의 지지가 탁월한 리더를 만들었고, 대제국을 건설한 겁니다. 요즘도 그의 일대기를 담은 ‘몽골비사’를 매일 읽으며 새로운 리더십을 발견합니다.”

-대통령의 정치 비전이 궁금합니다.

“몽골에는 ‘명예가 부서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뼈가 부서지는 게 낫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칭기즈칸과 같은 위대한 조상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명예를 지키고, 더 높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몽골인들은 놀라운 역사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 있는 국민입니다.”

정리=한우덕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군사신문 기자 출신 … 1990년 민주화 주도

엘벡도르지 대통령은 1990년 전후 몽골 변혁의 한복판에 있었다.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 그때 나이 27세로 군사신문 기자였다. 그해 몽골은 폐쇄에서 개방, 사회주의 체제에서 민주화·시장경제체제로 바꿨다. 몽골공산당(인민혁명당)은 일당 독재를 포기했다. 그는 자유선거에 나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그리고 35세 때 민주당 당수로 처음 총리가 됐다. 지난해 5월 대선에서 야당 후보로 나가 당선됐다. 그의 부정부패 척결 공약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샀다.

몽골은 내각제 성격이 강한 이원집정부제다. 대통령은 군사·외교를 맡고, 내정은 총리가 책임진다. 몽골 지도층은 젊고 역동적이다(그와 바트볼드 총리 모두 47세).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언론학을 전공했으며 2002년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했다. 미국과 러시아의 정치·문화를 경험해 국제적 균형감각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50여 분의 인터뷰 동안 준비된 원고 없이 자신의 생각을 세련되게 풀어놨다. 핵심을 먼저 던지고, 적절한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언론계 출신의 면모를 풍겼다. 인터뷰가 진행된 접견실은 검소했다.

밖에는 대형 칭기즈칸 초상화와 함께 게르(몽골식 전통 가옥)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칭기즈칸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겠다’며 역사의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 1963. 3. 30. 홈드 아이막 출생

▶ 1988 우크라이나 군사정치대학 언론학(학사)

▶ 1988 ~ 89 군사신문(Ulaan Od) 기자

▶ 1990 몽골민주연맹 창립, 국회의원 당선

▶ 1998 총리

▶ 2002 하버드대 정치행정학(석사)

▶ 2004 ~ 2006 총리

▶ 2009. 5. 대통령 당선


세계 8대 자원부국으로 전략적 가치

정부 DB시스템 한국형 도입
몽골 곳곳 ‘코리안 스탠더드’

1990년은 노태우 정부의 북방 외교가 절정인 때였다. 그해 옛 소련과도 수교했다. 몽골은 그해 3월 26일 우리와 외교의 문을 열었다. 그 무렵 몽골은 70년간의 사회주의 폐쇄의 장막을 걷어냈다(몽골은 1921년 옛 소련의 도움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세계 두 번째 공산국가였다). 수교와 함께 몽골의 진면목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국명도 되찾았다. ‘몽매하고 고리타분하다’는 중국식 표현인 몽고(蒙古)는 사라졌다. ‘용감하다’는 의미를 가진 몽골(Mongolia)이 대신했다.

몽골의 전략적 가치는 크다. 초원에는 자원이 넘친다. 세계 8대 자원부국이다. 몽골은 남북한 등거리 외교를 한다. 하지만 한반도 비핵화 등 우리 입장을 지지한다. 수교 당시 271만 달러였던 양국 교역은 지난해 2억 달러 규모로 늘었다. 하지만 인구가 적어 시장으로서의 매력은 아직 약하다. 몽골에 ‘코리안 스탠더드(한국 표준)’가 확산되고 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은 최근 몽골 각 정부의 데이터를 종합 관리하는 한국형 통합DB시스템을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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